씨앗과 호미로, 大地(대지)에 詩畵(시화)를 꾸미는 심진규 농부의 사계절 농사 일기
심진규(고성읍 월평리, 48년생)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0년 1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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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방산 아래 홍류골은 물이 좋아 농작물이 더욱 맛나다네. 마주앉은 부부의 머리위에 햇살 따스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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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봄 어느 날, 봄은 ‘여우 불’처럼 삽시간에 화라락 번져 온 대지를 따스함으로 물들인다. 일단 봄이 오는 기척을 들었으니 봄빛이 순식간에 산야를 덮기 전에 해야할 일이 산더미다. 우선 두엄을 낼 일이다. 농협을 통해 조합원 구매로 일반인에 비해 훨씬 싸게 구입한 퇴비를 몇 년동안 묵혀두었다. 날것의 퇴비가 아닌 푹 삭혀 발효시킨 두엄더미에서는 구수한 내음이 번진다. 그 속에는 지렁이도 굼벵이도 살아서 꿈틀거린다. 지난 가을에 심은 양파와 마늘 밭에도 거름을 뿌려야 봄의 햇살과 바람도 내음을 맡으며 같이 먹자고 고랑에 살랑살랑 스며들 것이다. 겨울 지나느라 땅에 납작 엎드려 옆으로 퍼져 자라던 시금치도 고소한 내음을 찾아 코를 킁킁거린다. 겨울에 먹어야 제 맛이던 시금치도 상품으로 가치있는 것들은 죄다 베어냈으니 작고 볼품없던 몬초리(못난이)들이 제 세상을 만나게 될테다. 홍류골에 연둣빛이 스며들었다. 백운사의 풍경소리가 마을까지 내려온다. 밭둑에서 냉이를 캐느라 엎드려 있던 집사람의 관심사가 산기슭으로 옮아가는 중이다. 홀잎을 뜯어 살짝 데쳐 나물로 무쳐서 점심상에 내 놓았는데 봄 맛이 제대로 났다. 배릿하면서 야들야들하고, 미끈거리면서 혓바닥을 감싸는 이 맛이 진정 봄의 나물 맛이지. 양지바른 곳에는 고사리가 돋기 시작했다. 봄의 안테나처럼 쭈빗쭈빗 솟은 고사리를 톡톡 꺽어와서 굵은 놈, 가느다란 놈, 살짝 핀 놈으로 따로 구분해서 삶을 때 풍기는 독특한 내음이 향그럽다. 저 내음을 70년 넘게 맡았군. 너들강에 다래순도 따러 가야하고 미역취와 참취를 뜯어와서 무쳐주겠다는데, 집사람도 이젠 늙는 모양이다. 눈은 날쌘데 걸음은 더디다. 야생 냉이를 뿌리까지 캐 와서 된장국에 자작자작 넣어 끓이면 맛나는데…….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알아 듣는다’란 말이 있다. 농사 짓는 사람이 부지런히 밭으로 나가서 손을 봐 주고 챙겨줘야 제대로 자란다. 오늘은 얼마나 자랐는지, 내일은 얼마나 자랄 것인지, 나는 시험 감독처럼 작물을 하나하나 챙겨본다. 앞집 모친의 대문앞 동백나무에 꽃이 화사하다. 겨울부터 피기 시작하더니 봄이 오는 소리 들으며 송이채 툭툭 떨어져 내리고 있다. 아름드리 나무가 된 동백은 가지도 잎도 무성하더니 그 낱낱의 가지마다 얼마나 많은 꽃송이를 매달았는지 눈부시다. 저 나무는 경남도청을 새로 지을 때 정원수로 사 가겠다고 공무원들이 몇 번이나 청을 넣었다는데 주인이 거절하셨다는 일화가 있다. 그 때 팔려갔으면 저렇게 무성히 꽃을 피웠을랑가? 내 입장에서 보면 잘 된 일이다. 우리 집 앞에 저렇게 아름답게 꽃 피우고 잎 키우니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날이 풀리고 따뜻해지니 일하기가 수월하다. 이 밭 저 밭으로 옮겨다니며 챙기다보니 이마엔 땀이 송송 맺힌다. 따스한 봄 볕을 등에 배낭처럼 업으니 몸은 노곤해진다. 달력을 보니 청명, 한식, 곡우가 순식간에 휘몰아치듯이 지나갔다. 봄나들이라도 한번 떠나야할 터인데, 올해는 아무래도 몸을 사려야한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코로나 바이러스란 놈이 온 세상을 꽁꽁 짜매놓았으니 말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무시무시한 놈으로 인해 마스크는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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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배추가 얼마나 자랐는지 그 속을 살펴봐야 알지. 언제쯤 내다팔면 좋을까, 집에 찾아올 손님들께 선물 하는게 좋을까, 소곤소곤 다정도 하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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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여름 어느 날 뭔 비가 이렇게 찔끔찔끔 자주 내리는지, 온 세상이 눅눅하다. 6월 하순에 상추 씨앗을 뿌리면서 물빠짐에 특히 신경을 썼다. 벼를 제외한 모든 밭작물은 물빠짐이 제일 중요하다. 작물은 물을 듬뿍 마시고 성장을 계속하지만 나무에 비해 뿌리가 여리기 때문에 장마철에는 녹아버리기 일쑤다. 여름 작물이 흉년이라고 뉴스에서 야단이다. 동네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 열무는 흔적도 없어졌고, 고추도 병이 들어서 시름시름 앓는단다. 내가 키우는 주 작물은 상추다. 연중 날씨를 예견해, 올해는 비가 잦을 것 같다길래 물빠짐을 위해서 이랑을 높이 크게 잡았다. 그리고 솎음도 중요하다. 상추는 엽채류 중에서도 잎이 여리고 뿌리는 일자형이다. 쏘물게 뿌려진 채 그대로 두면 몸과 몸이 닿아서 제대로 자라지 않음은 물론이고 서로가 영양분을 먹으려고 싸우느라 정작 자신의 몸은 돌보지 못하는 격이다. 적당한 간격으로 잘 솎아주기, 이것이 곰팡이를 제거하고 상추를 잘 키우는 첫 번째 비결이다. 상추를 키우면서 드는 생각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간격이 필요하고 밀집 접촉을 피하라. 올해 상추는 최고가에 판매했다. 10키로 한 상자에 4만원에서 4만5천원에 냈다. 6월 하순에 씨를 뿌려 10월 하순까지 넉 달이면 상추 농사는 끝이다. 50일 가량 키운 뒤에 내다 팔 수 있으니 비용이 적게 들고 관리도 수월하다. 다만 일손이 필요하니 아내와 내가 새벽부터 밤까지 쉼없이 일해야 하는 점. 부지런해야 하는 첫 번째 농작물 중에 상추가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3월에 심은 감자도 6월에 수확하여 내다 팔았고, 양파도 뽑았더니 알이 실하고 굵어서 上品으로 제 값을 받았다. 마늘도 소출이 좋았다. 남들은 흉년이라 울상을 지었지만 나는 물빠짐에 각별히 신경을 쓴 탓에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지난 늦봄, 고슬고슬 잘 마른 밭에 양파 씨앗을 뿌렸더니 제법 자라있다. 겨울 배추를 빼 낸 자리에 거름을 넣고 땅을 잘 다독여 둔 곳이다. 모종이 어느 정도 실해져야 9월초에 팔 수 있을터. 양파 모종은 8월 고온에 소독을 잘 하고, 비닐을 덮어 40도 이상의 온도로 훈증을 해 줘야 썩지 않고 잘 자란다. 모든 작물은 나름의 성장점과 법칙을 가지고 있다. 그 성질을 잘 살펴서 원하는 환경을 만들어 주면 잘 자라기 마련이다. 씨앗을 뿌리고 어린 모종이 자라는 동안 저마다의 개성을 살피는 손길에서 작물은 성장과 열매 맺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9월 초순이면 내가 제일 바쁜 시기다. 대가면, 거류면, 동해면(올해 180단 공급) 등지로 양파 모종을 배달가야 하기 때문이다. 수십년 거래를 한 터라, 마을 이장과 부녀회장으로부터 단체 주문을 받아 그동안의 안부를 묻고 모종을 건네고 값을 셈한다. 1천500평에 묘종을 파종, 최고가였을 때 1천500만원의 매상을 올리기도 했으니 제법 쏠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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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순 생일에 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우애를 나누고 사랑과 건강을 빌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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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어느 가을 날 1남 3녀의 자식들이 차례로 온단다. 사람과 접촉을 피하라고 하는데 부모 자식간의 보고픔을 어이하랴. 다들 조심하라는 당부를 입에 달고 살다가 모처럼 만나게 되니 반갑기 그지없다.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큰딸이 제일 먼저 왔다. 아직 미혼이라 염려스럽지만 요즘은 비혼도 흔하고 자신은 학생들 가르치며 보람있게 살아가니 걱정말라고 큰소리 친다. 어쩌랴, 예전 같으면 혼기가 넘은 자식을 가진 부모는 죄인처럼 고개를 못 들었지만 요즘은 개성시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다져가고 엮어가는 것을. 나는 큰딸 덕을 많이 본다. 뭣보다 딸과 같이 떠난 몇 번의 외국여행은 두고두고 꺼내보는 행복한 추억이다. 따뜻하고 자상하게 아빠를 살펴주며 여기저기 구경하고 도란도란 얘기 나누던 여행의 기억은 되짚어볼수록 더욱 즐겁다.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옛말처럼 고학으로 제 앞가림을 잘하더니 동생들도 돌봐주고, 공부하는데 물심양면으로 도움주었으니 고맙기 그지 없다. 둘째딸과 사위는 영수학원 원장이다. 딸이 영어를, 사위는 수학을 전공하여 학생들을 가르친다. 올해는 전대미문의 코로나로 학생들이 학원에 오지 못해 일이 없다고 안타까워 한다. 그런 자식을 보는 부모맘은 오뉴월 땡볕에 갈라지는 논바닥보다 더 타들어 가는 것을. 건강하면 된다, 아끼면서 살면 된다, 돈은 다음에도 벌 수 있으니 너무 맘 상하지 말라고 위로를 건넨다. 셋째 딸은 복지사로 일하고 사위는 철강회사에 다니고 있다. 금슬이 좋아서 서로 아끼며 다정히 살아가는 모습이 어여쁘다. 사위가 내 여식을 귀히 여기고 존중해 주니, 이보다 더 감사할 일이 무어랴. 아들은 고성소방서에 근무 중이다. 누군가가 위급한 일을 당하면 제일 먼저 달려가서 목숨을 구하고 어려운 일을 해결해주니 모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있다. 직접 현장에 가서 아들의 일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뉴스에 화재 장면이 나올 때마다, 내 아들도 저렇게 물불 안 가리고 달려가서 누군가를 구하는 일에 소명을 다하는가 싶어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하다. 부모 맘이니까 어쩌랴. 며느리는 농산물품질관리소에서 일한다. 품성이 따뜻하고 인정있고 속이 깊다. 쳐다만봐도 배 부르고 빙그레 웃음이 도는 사람이다. 네 명을 낳아 기르는 동안 속 썩이거나 애 태운적 없었다. 부모의 의견을 잘 따라주었고 저마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준 자식들이다. 손주들도 건강히 잘 자라고 있으니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어디 있으랴. 초가을에 심은 배추가 제법이다. 밀식密植했지만 지그재그로 간격 조절을 잘 했더니 포기들끼리 닿지 않고 잘 자랐다. 수분을 워낙 좋아하는 식물이라 며칠에 한 번씩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 주었다. 농약을 뿌리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아침 이슬을 받아먹으려 나오는 배추벌레를 찾아내는 일이 농부의 몫이다. 배추는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돌아서면 손가락 한 마디씩 자라는 배추들, 저들은 몇 번을 죽어 맛있는 김장이 되고 사람들에게 좋은 에너지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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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딸과 떠난 대만 여행에서, 고소공포증으로 집사람은 동행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지만 큰딸과 알콩달콩 좋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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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겨울이 되었다. 벽방산碧芳山 만산홍엽滿山紅葉도 길을 잃었다. 수북히 내려 쌓인 잎새들은 거름이 되어 내년 봄에 꽃 피울 온갖 나무들의 영양분이 될 테다. 벽방산의 훤한 이마가 반듯하다. 그 기운이 마을로 내려오는 것을 느낀다. 올 봄에 만화방초萬花芳草까지 임도를 완료했다. 4년에 걸친 사업이었다. 4시간이 걸리는 임도를 천천히 걸어보았다. 홍류골에서 태어나 한번도 이 곳을 벗어나지 않고 평생을 살아왔다. 지게 지고 소가 끌어주는 쟁기질로 농사를 배웠고 지금은 경운기와 리어카와 트럭으로 농사를 마무리 하는 세월을 지켜보고 있다. 1995년 초부터 15년간 마을 이장을 맡아 경지 정리사업과 마을의 농로 개선과 마을회관 신축 등의 사업을 이루었다.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 반대 의견도 있고 적극 찬성하는 이웃들도 있기 마련이다.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으니까. 이장으로 일하면서 마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하고 생각하며 살았다. 태어나서 뼈를 묻을 내 고향을 어찌하면 발전시킬지, 조금이라도 좋아질지 수 없이 질문하고 스스로 답했기에 미련도 후회도 없다. 나는 평생을 농부로 살아오는 동안 공부하고 또 노력함에 게으르지 않았다. 책을 읽고 농민신문을 탐독하고 유튜브로 배우면서 연구하는 농부가 되려 했다. 大農은 농업기계화와 체계적인 관리로 승부수를 던진다. 나같은 小農은 땅을 잘 활용하는 2모작으로 승부해야 한다. 같은 작물을 같은 땅에 연작하면 동일한 병원균이 증가하여 토양 전염병을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해마다 작물을 바꿔야 한다. 나는 가장 기본적인 사항에 철저했다. 작은 평수의 땅에 합리적인 방법으로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공부했다. 재배기간이 짧고, 일손을 분배할 수 있고, 판로가 좋고, 수요가 많은 작물을 키우는 것이 실패하지 않는 농사법이다. 지금까지 내가 재배한 감자, 상추, 양파, 양파모종, 배추는 2모작이 가능했고 수확량에 비해 소득도 괜찮았다. 올 겨울엔 천포기 이상의 배추를 재배하여 절임배추로 판매했다. 품질 좋은 씨앗의 배추를 심고 물을 잘 주어 아삭하면서도 맛나게 키운 배추라 인기가 좋았다. 해마다 주문하던 단골이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주었으니 다행한 일이다. 절임 배추들이 김장이 되어 단란한 가족의 주황빛 등불을 밝힌 식탁위에 오를 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난다. 나는 평생을 농부로 살아오는 동안 무리하지 않고 자력으로 열심히 살았다. 땅의 마음을 읽고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다. 농작물을 키우면서 정성과 사랑으로 보살폈다. 부지런히 일했다. 이 나이 되고 보니 어느 정도 삶이 보인다. 젊을 때 도회로 간 사람이나 농촌에서 흙을 일구며 산 사람이나 뒤끝을 대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는 믿음이 생겼다. 한 평생을 살면서 자식 잘 키우고, 부부가 몸 건강하고, 이웃의 신망을 잃지 않고 산다면 충분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 삶이 도회에 있든 시골에 있든 무엇이 다르랴. 집사람과는 때론 토닥토닥 거리면서도 오순도순 잘 살아왔다. 밥상을 앞에 놓고 마주앉아 김치를 찢어주는 집사람의 웃음이 선하다. 평생 농사 짓느라 손마디는 굵고 주름은 깊어가지만 이 또한 세월이 주는 선물인 것을. 꼼꼼하고 정확한 내 성정을 쫓아다니느라 집사람의 고생이 많았다. 빈틈을 허용하지 않고 매사에 마무리를 확실히 하고 철두철미하게 사는 남편 수발에 얼마나 맘 상할 일이 많았으랴. 그래도 따지지 않고 웃음으로 마무리해 준 집사람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이 따뜻하고 훈훈하다. 오늘 밤엔 보일러의 온도를 한껏 올려야겠다. 김장 하느라 고생한 집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알이 꽉 찬 맛있는 배추를 키우고 절여서 배달을 끝낸 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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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0년 1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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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세상은 그냥 살아지는게 아니라 살아내기 같습니다.
부단히 땀흘려서 애쓴 진실함으로 한평생 살아내기 하신 어르신들의
토속적이고 원초적인 이야기들....
그 순박하고 감회스런 삶의 이야기를 가슴으로 담아갑니다
남외경 작가님의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
01/03 00:30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