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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우주를 지키는 사람은 외롭지만 당당하다 고독한 사람이 사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성만기 (동해면 소담수목원. 75세)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0년 12월 11일
↑↑ 외국에서 종자를 가져와 발아과정을 거친 뒤 옮겨심은 40년 된 대왕참나무 앞에 서서, 자신이 키워온 숲을 헤아리는 성만기 소담수목원 원장
ⓒ 고성신문
나는 동해면 좌부내에서 5남 1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지내시다 해방과 함께 귀국하신 아버지는 생각이 남다른 분이셨다. 나에게 자신의 못다한 꿈과 희망을 걸고 다부지게 키우려 하신듯 싶다. 아버지에게는 맏아들이 믿음과 기대의 짐을 잔뜩 지우기에 좋은 대상이었겠지만, 줄줄이 아들 다섯을 낳은 어머니의 노동은 얼마나 혹독하고 무거우셨을까? 서운하지 않게 끄트머리에 겨우 고명딸을 낳아 딸 없는 아쉬움은 푸셨지만 그 막내딸이 얼만큼의 노동을 대신 해 주었는지 모를 일이다.
농어업을 겸할 수 있는 지역은 아무래도 물자가 풍부한 편이었다. 내 아버지는 생계 유지를 위해 바다 중심의 삶을 선택하셨다. 정치망 어장은 멸치를 비롯하여 온갖 잡어들이 잡혔다. 진동만의 물길이 당항포로 밀려들면 온갖 어종들이 좌부내 쪽으로 밀려왔으니 내 기억 속 최고의 풍어는 도미를 500마리나 잡았던 일이다. 滿船을 표시할 때는 대나무를 베어 아래쪽은 가지를 쳐내고 오방색의 깃발을 달았다. 깃발을 휘날리며 배들은 생선의 무게로 인해 깊숙이 가라앉았고 물칸이 자리한 쪽으로 15도 가량 기울어진 채 선착장에 닿았다. 생선의 품질은 살아있음이 최우선이었으므로, 이미 진동이나 마산의 어판장에 쏟아내고, 동네 사람들을 위해 남겨온 몇 상자뿐일지라도, 깃발이 의미하는 만선의 느낌만으로 식구들은 충분히 배불렀고 흥에 겨웠다.
↑↑ 수목원을 돌보며 나무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었다. 봄의 연둣빛에 어울리는 꽃들을 불러오고 여름과 가을에 맞는 화음의 식물들이 나타나 함께 어울리는 식물들은 그 낱낱이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는 거란다.
ⓒ 고성신문
아버지는 지혜로우셨고 이재에도 밝은 분이셨다. 그 당시 바다를 막아 농토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사업이었다. 생전에 천 평 넘게 바다를 간척하여 농토로 사용하셨고 돌아가신 뒤 안방 서랍장에는, 설계하여 허가를 받았지만 사정상 못 이루신 간척허가증이 들어 있었다. 이천 평이 넘는 매립 허가서류를 서랍에 넣어두고, 자금 부족으로 소원하시던 일을 이루지 못한 아버지의 꿈이 내 가슴에 쓰라리게 남아있다. 아버지는 지역의 어촌계를 주도하여 만드셨다. 어부들이 마음과 힘을 모아 공동 작업과 공동 판매를 통한 수익 및 권리 증진의 일을 하신게다.
아버지는 자식들 교육열이 높은 분이셨다. 정치, 문화, 경제적 배경 없는 농어촌살이의 야박함과 팍팍함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하고 아는 것이 힘이라는 논리에 충실하셨다.
나는 동해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동중학교에 진학했는데 당시 하숙비가 쌀 두 말이었다. 하루 2번 운행하던 도선을 타면 진동고현까지 닿았고, 거기서 마산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동네에서 농사가 제일 많았고 어장 일에 항상 바쁘셨다. 중학생인 아들을 위해 마산까지 쌀을 가져다 줄 시간도 없었지만, 그런 일은 아예 당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듯, 도선에 실어주는 것으로 끝이셨다. 나는 하숙집까지 쌀 두말을 운반하는 법을 스스로 익혔다. 지금 생각하면 그 또한 아버지의 교육 방법이 아니었나 싶다. 일찌감치 돈과 배경이 없는 궁핍한 농어촌 가정의 맏이가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립하는 힘을 길러야 했고, 주위의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방법을 익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이 아니었을까. 좌부내 우리 집에는 경찰과 선생님 공무원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나마 사회가 어찌 돌아가는지에 대한 정보와 이치를 가진 나름의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아버지는 세상을 읽으시고 자식 교육에 대한 소통의 창구를 열어두신 게다.
마산 동중을 졸업하고 치열한 입시를 통과하여 부산 동아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부산은 물자와 교역이 풍부했고 일본을 비롯하여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활기가 넘쳤다. 본격적인 고등학교 생활이 시작되면서 나는 긴장했다. 촌뜨기로 무시받지 않으려고 애썼다. 성적은 쉽게 올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닌지라 운동에 집중하면서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고 사회성을 기르고 도시의 문물에 익숙해지는 법을 터득했다. 또한 스스로 생활비를 마련하고자 알바 자리를 찾다가 친구의 소개로 은행간부의 집에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그 댁 자녀들을 가르치면서 보통 이상으로 잘 사는 집의 범위와 그들이 사는 다른 세상을 엿볼 수 있었다. 시골에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들의 생활 패턴을 보며 내 시야는 넓어졌다. 몇 군데를 거치며 나는 세상을 더 많이 살폈다. 도회지와는 먼 시골의 순박한 어부로 사셨지만 열정과 목표와 성실과 순수와 근면의 생활 태도를 온몸으로 보여주셨던 내 아버지의 생활 방식이 존경스러워졌다. 학업과 가정교사 일을 하면서 합기도에 매진했다. 고교 땐 2단 이었고 운동을 계속하여 성인이 된 뒤에 공식 6단을 취득하여 광무관의 수석 사범으로 추대받았다. 합기도로 상대와 정당하게 겨루기 위해서는 힘의 균형이 필요하다. 꾸준히 체력을 길렀고 분명한 의사 전달로 상대방에게 나를 어필했다. 덩치나 배경과 힘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함으로 맞섰다. 학교에서는 선도부장을 맡았다.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에 부장 완장을 차고 교문 앞에 서서 학생들의 복장을 살피노라면 지나가던 부산여고 학생들이 힐끔힐끔 쳐다보곤 했다. 내게 관심을 주던 여고생이 몇 명 있었지만, 나는 사춘기의 풋마음을 살필 여유와 겨를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자력으로 졸업하고 대학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섰다. 윤호를 빼고 친한 친구들과 서울로 올라갔다. 몇몇은 연세대에 원서를 썼고 저마다 합격할 수 있는 다른 대학을 알아보는 중이었다. 동생들이 줄줄이 중․고등학생이 되었고 형으로서의 책임감도 피할 수 없는 상태였다. 갈등과 소신 사이에서 망설이는 동안, 원서를 쓸 기회를 놓쳤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을 경험하면서 군입대를 결정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고성군청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다부진 체격과 운동으로 다져진 체력으로 경남 최고의 점수를 받아 합격했다. 입대한 뒤에는 보안부대에 소속되어 고급 장교들의 동향을 살피는 임무를 맡았다. 사복차림으로 육사에 파견되어 대통령, 헌병사령관, 보안사령관 등 고위직이 승마와 골프 등 고급 운동을 즐기는 모습과 동선을 보고하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지인의 소개로 월남전 파병을 권유받았다. 오옴리에서 교육을 받고 눈보라 치고 추운 겨울 날 월남으로 떠나게 되었다. 맹호부대에서 내 소속은 본부사령실이었다. 선임병이 해 주었던 이 문장이 아직도 선연하다. ‘돈을 알면 죽어!’ 미군본부 PX에 필요한 보급 물품을 신청하면 심사를 거쳐 물품이 왔다. 영관급 고급 장교들로부터 카메라, 녹음기, 냉장고, 알부민 등의 부탁을 많이 받았다. 그런 물품들 일부는 누군가의 재산증식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 같았다. 나도 많은 부탁을 받았지만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중심을 단단히 잡았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한테 무엇인가를 달라고 하는데 당신은 왜 요구하지 않냐?” 보급병으로 같이 일하던 미군이 이런 말을 할 때 당당히 되받아 쳤다. “나는 그런거 필요치 않아!” 가난하고 부족하게 살더라도 대가없이 무엇인가를 얻는 것은 부끄럽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새삼 떠올랐다. ‘사람은 정의로운 일을 하며 살아야지. 양심에 가책 받을 짓을 하면 언젠가는 당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우친 것이다.
월남전에서 임무를 마치고 제대를 앞두고 있는데 보안사령관실에서 연락이 왔다. 범죄수사를 위한 요원이 필요한데 미군 정부와의 협의를 거쳤으니 유학을 가면 어떠냐는 것이었다. 그길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 노스웨스턴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4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다.
1973년 귀국하여 부동산 개발 회사에서 컨설팅 업무를 하던 중 ‘당신의 꿈을 세계로!’ 라는 포스터를 만났다. 대한항공에서 유능한 인재를 모집한다는 공채광고였다. 오일 쇼크로 수많은 실업자들이 생겨 경제 지표는 하락 중이었고 취업의 길은 멀었다. 유명 대학을 졸업한 인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대한항공은 8~9개월의 선발 과정을 거쳐 직원을 뽑았다. 체력테스트부터 심층 면접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입사가 결정되었다. 일반직과 승무직을 선택해야할 때 나는 두 직을 겸할 수 있는 승무직을 선택했다. 부동산 컨설팅 회사에서 받던 월급은 1만7천 원, 대한항공에서는 각종 수당을 합하여 초봉으로 6만3천 원을 받았다.
↑↑ 생명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은 무한정이다. 수목원에는 족보있는 개들이 십여 마리 함께 살고 있다. 자연과 대화할 때 가장 행복한 것을.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면 세상의 모든 이치도 함께 오는 것이 아닐까.
ⓒ 고성신문
대한항공에서 일하며 지구를 300바퀴 이상 돌았다. 하늘에 떠 있는 비행 경력만 따져도 만 6년의 시간이 넘었고 상무이사를 끝으로 대한항공을 떠났다. 비행하면서 전 세계를 여행했다. 어느 날 읽은 책에서 ‘종자가 세상을 바꾼다’란 문장을 만났다. 이 말에 꽂혀서 세계 곳곳의 종자상을 돌아다녔다. 독일가문비나무, 주목, 대왕참나무, 매자나무, 회화나무, 계수나무, 복자기단풍 등의 종자를 구해 국립임업시험장에 발아를 부탁했다. 이런 나무들 중에는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나무도 있었지만 같은 이름을 가졌어도 외국에서 들여온 나무들이 많았다. 종자들을 개인이 발아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특수기술과 관찰이 필요했다. 임업시험장에 연락하여 발아하면 국가에 귀속할테니 종자를 잘 돌봐달라고 당부했다. 지금 광릉임업시험장 종자실에는 내 이름의 기증서가 남아 있다. 그렇게 발아된 대왕참나무는 전국에 분포하여 잘 자라고 있다.
어린 묘목을 심을 곳이 필요했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땅에 묘목을 심고 부족한 땅을 샀다. 40여 년 전, 일부 간벌을 하고 임도를 만들었다. 내가 다닌 여행지 중에서 독일의 ‘하이델베르그 철학자의 거리’가 인상 깊었고 고향에 그런 수목원과 숲길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내 고향은 입지조건이 최고다. 도시와도 가깝고 교통이 좋은 것은 물론 더 중요한 특별함이 있다. 고요와 평온과 활기찬 기운과 바다가 보이는 곳, 늘 간간짭쪼롬한 해풍이 나무들을 어루만져 준다는 것이다. 임도를 내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고향에 돌아와 수목원 조성을 시작할 때 개인이 산길을 낸다는 사실을 쉬이 인정해 주지 않는 분들이 계셔서 설득에 시간이 걸렸다. 로키 산맥과 스위스의 아름다운 산길을 보며 내 고향에도 저렇게 아름다운 길을 만들어야겠다는 의욕이 현실을 만날 때 길 위에 한숨과 원망이 쌓여갔지만, 길이란 원래 뻗어나가기 마련이던 것을.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마다 사연이 있고 역사가 있다. 정성껏 심고 가꾼 애착 때문에 베어내지도 옮기지도 못한다. 40년 전에는 작은 묘목이었던 나무들이 이젠 수십 미터의 청년 나무로 자랐다. 그 나무 아래 수많은 꽃들이 피었다 진다. 봄의 정원에 은방울꽃이 춘정을 피우고 붓꽃이 낱낱의 사연을 기록하는 동안, 여름이 당도하면 원추리와 까치수염이, 뒤이어 수국과 산비장이 산길을 밝혔다.
나는 어느새 수목원의 지휘자처럼 낱낱의 꽃들에게 존재감을 준다. 키 큰 나무들이 제 몫의 잎으로 그늘과 바람을 주는 동안, 열매들은 부지런히 익어간다. 잣나무 솔방울이 떨어지고 참나무에서 굴밤이 구르면 다람쥐와 청설모가 반갑게 나온다. 단풍이 일곱의 색으로 물드는 것을 지켜보는 창가에 차향은 감미하다. 지금 수목원에는 늦은 수국이 피고, 보랏빛 멕시칸세이지가 어여쁘다. 화살나무 잎들과 풍나무의 단풍물은 최상급으로 화려하다. 산사나무 열매들이 새들에게 풍성한 먹이를 주는 동안, 돌배나무와 고욤나무는 열매를 천천히 땅에 내려놓는다.
내 나이 75세, 노동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이제는 나무들과 꽃들을 가꿀 기력도 딸린다. 어쩌면 저 나무들과 꽃들은 스스로 가지와 잎을 정리해 나가리라. 키 낮은 풀들에게도 자리를 내어주고 수분과 영양을 나눠 먹으리라. 그렇게 함께 살아왔던 흔적을 더듬으며 자신을 지켜가는 의리를 보여주리라.
50년을 동행하며 무거운 짐을 지워준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맏며느리로 고향에 돌아온 시점부터 어머님을 오래토록 모셨다. 중풍을 앓으신지 28년, 23년을 집에서 모셨고 최근 5년은 요양병원에 계신다. 수목원 안의 찻집을 운영하며 6남매의 맏이로 사는 동안, 할 말도 모두 삭혀 저 숲속의 낙엽 갈비 아래 차곡차곡 쌓여 있을 터.
의사로 환자를 보살피는 아들과 판사로 죄인의 죄값을 매기는 며느리는 그들의 삶을 살겠지만 내가 보기엔 안타깝다. 자신에게 집중하기보다, 타인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내 맘에 안 찬다고 그들의 삶이 하찮거나 가볍지 않다. 그러함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자연을 떠나 대도시의 아우성 속에 사는 아들 내외의 삶이 마땅찮은건, 내 우주는 숲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한 톨의 씨앗이 땅에 묻혀 묘목이 되고 수십년의 시간을 이웃 나무들과 어울리며 숲을 이루고 그 안에 수많은 생명들을 키우는 푸르고 청정한 나눔의 삶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키우는데 열중했다.
회사에서는 조직을, 고향의 선산에 수많은 나무를 키웠다. 당항포에는 내가 기증한 대왕참나무 500주는 어른 나무가 되어있다. 동해면은 대왕참나무가 자라기에 좋은 입지조건을 갖췄고 씨앗으로 많은 아기나무들을 퍼트렸다. 지나가다가 그 나무들을 볼 때마다 성장의 의미와 진정한 존재가치를 확인하게 된다. 나는 키움에 대한 의미를 깊이 새기며 살아왔다. 내가 살아온 삶에 당당했고 흔들리지 않았고 후회하지 않는다. 여전히 꿋꿋할 수 있는 것은 내 속에 작은 우주를 품어서이다. 자신의 우주를 지키는 사람은 강하고 외롭다. 나는 고독한 사람이 세상과 사회를 변화시킨다고 믿는다. 숱한 고민과 사색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의 외길을 묵묵히 걸어가면 새로운 길이 닦이기 마련이다. 지금 우리가 걸어가는 모든 길도 고독한 누군가가 앞서서 닦은, 외로운 그의 첫길이었으리. 사람은 떠나도 나무들은 오래오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당항포 바다를 내려다보며, 다리를 지켜보며 나무들은 자신들의 나이테를 채워 나가리라. 한 사람이 지켜온 우주를 또 다른 누군가가 알아 줄 것이고, 그 모습을 나무들은 말없이 지켜본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도 나무는 오래토록 남아서 자신이 지켜야 하는 우주를 떠받들게 되는 것이다. 바람이 분다. 벽오동 가지를 흔들고 가는 바람결에 또 한 해가 실려 동진교를 건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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