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나무로 우뚝 섰으니 그늘이 깊고도 넓소 우리 집안의 기둥이고 대들보 되셨으니 참으로 고맙소
이경희 (고성읍 거주, 동해면 출신. 86세)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0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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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집 마당에 꽃들이 예쁘게 피었소. 저 식물들은 해마다 찾아와 기별 하며 반겨주는데 우리네 인생길은 한번 떠나면 다시 오지 않는게요. 살아 가는 동안 후회없이 잘 살아야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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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님, 오늘은 내 살아온 이야기를 해 볼 참이오. 내가 올해 여든 다섯, 1936년 병자년 생으로 아우님과는 열 네 살 차이요. 아우님은 우리 집안의 귀하디 귀한 보물이었소. 부모님이 자식 여럿을 어릴 때 잃고 딸 둘만 건졌는데, 집안의 대를 이으려고 공을 많이 들였소. 부친이 마흔 넘어 얻은 첫 아들이니 얼마나 금지옥엽 하셨을꼬. 내가 등이 닳도록 업었드렸다 하면 공치사 심하다고 나무라진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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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아들 내외가 이렇게 꾸며줍디다. 평생 못 입어본 드레스 한번 입으라고요. 내가 맞나 싶으면서도 보고 또 보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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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에서 태어났소. 부모님은 동경 한 복판에서 포목점을 운영하시었소. 일제 강점기에 살기 고달파서 일본으로 떠난 사람들이 많았다 하오. 고성은 부산과 가까웠으니 배를 타고 돈벌이를 떠났던 모양이오. 작은아버지, 이모부, 외삼촌, 아재들까지 한국인 10여 명이 함께 살았소. 규모도 컸지만 살림이 넉넉하여 유모와 식모도 두었소. 내가 학교에 다닐 무렵 미군 비행기가 동경 하늘에 자주 나타나곤 했소. 여차하면 피난을 가야한다며 산 아래 굴을 파고 대피소를 만드는 등 일본 전체가 전시 태세였소. 동경이 위험하니 살 수가 없다며 부친은 후쿠시마에서 모래 장사를 시작하셨소. 함께 살던 장정들은 후쿠시마로 떠났고, 집에는 우리 식구만 남아서 이사 날만 기다리고 있었소.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요. 밤중에 미군 비행기가 나타났소. 처음엔 비가 오듯이 기름을 철철 뿌리더니 폭탄(쇼이당)을 마구 터트렸소. 학교에서는 폭탄을 피해 무조건 산이나 굴로 달려가라고 교육을 했었소. 2층 내 방에서 잠옷 차림으로 가방만 메고 맨발로 집을 나섰소. 사방이 난리벅구통이 벌어진터라 제 정신이 아니었소. 나는 산으로 달려갔고 정신을 차려보니 절집이었소. 자고 일어나니 나 혼자였소. 큰일 났다 싶었지만 난리통에 누가 나를 챙겨줄거요?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온 길을 되짚었소. 살던 집 옆에도 절이 있었소. 그 곳을 찾아 층층계단을 올라가니 아버지가 계셨소. 부모님도 나를 잃어버리신 줄 알고 혼이 반쯤 나가 계셨소. 함께 집으로 오니 불에 탔지만 시꺼멓게 그을린 밥솥은 그대로였소. 허기를 채우고 그 길로 떠났소. 난리통이라도 오후 4시면 어김없이 구호물품이 내려왔소. 생필품을 챙기고 요기를 해 가며 후쿠시마에서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을 만났소. 한국 사람들은 한 곳에 모여 살았는데 동경이 폐허가 되면서 모든 경제 활동이 중단되었고 한 둘 떠나기 시작했소. 난리를 겪고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단 이야기를 들으니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거요. 너도나도 고국으로 돌아가 버리니 부친의 모래사업도 지지부진해 졌소. 해방 되던 다음 해, 남은 사람들 모두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발싸심을 했소. 우리 가족도 보따리를 싸서 고향으로 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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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6남매가 모두 모여서 서로 웃으며 사진 찍으니 참 좋습디다. 아무도 떠나지 않고 함께 사는 이 세상이 얼마나 고맙고 찬란한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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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인 동해면 장기에 왔더니 형편이 어려웠소. 부친은 나름대로 고향에 계시는 형님께 돈을 보내드렸는데, 시골 형편도 곤궁했던 모양이오. 작은아버지 식구까지 부친의 3형제가 좁은 집에서 지낼 수 없어 각자 분가를 했소. 부친은 우산리 밤내에 집을 한 채 사서 이사를 했소. 귀국할 때 모친이 수태 중이던 동생을 다음 해 정월에 사산했소. 사내아이였다는데 부모님의 슬픔이 매우 컸소. 그 아이를 단지에 넣어 애기장터에 묻었소. 봄에 하얀 찔레꽃이 피었는데 모친이 얼마나 섧게 우시든지 지금도 찔레꽃을 보면 가슴이 아리오. 모친이 하도 슬퍼하시니 집을 팔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소. 아우님, 내가 18살 되던 해 동짓달, 안정에 사는 총각 집에서 중매가 들어왔소. 그 댁이 안정인데 장기까지 걸어오느라 오후가 되었소. 서로 인사를 나누고 선을 보려는데 겨우 4살인 아우님이 이런 얘길 했소. “날이 어두우니 불을 켜세요.” “아이고, 귀한 아기 도령께서 서로 얼굴 잘 보라고 이르는 모양이시우.” 시모님 되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셔서 전깃불을 환하게 밝힌 집에서 선을 보았소. 중신아비 말대로 총각 인물은 근동에 둘째가라면 서러울만치 훠~언하고 키도 훤출했소. 그 댁이 안정에서 논농사도 제법 되고, 시모님 되실 분이 일류 바느질쟁이라 하였소. 큰어머니와 모친이 그 댁 사는 형편을 확인하러 갔더니 집 앞 우물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더래요. 뒤뜰에는 청솔가지를 말린 나뭇단이 바리바리 쌓여 있었답디다. 그걸 보니 우리 모친이 갑자기 맘이 흡족해 지더라 안하요. 장기에서는 물이 귀했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느라 애를 태웠었소. ‘이 집에 시집 가면 고생 않고 편하게 살겠구나.’ 싶어서 혼사를 결정했다 하오. 혼삿날이 정해지고 식을 올렸소. 신랑은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이었소. 마침 영장이 나와서 군대에 간 동안 나는 친정에서 지냈소. 3년 뒤 기별이 와서, 트럭 뒤칸에 가마를 얹고 가마 안에 요강과 떡을 넣어 시집을 갔소. 시집살이가 맵고 찹습디다. 신랑 마음은 먼 허공을 맴도는 듯 했소. 배운 신랑이 못 배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았고, 키가 크고 훤칠한 신랑이 키 작은 내가 맘에 안 드는 것 같았소. 그래도 부부의 연을 맺고 살면서 자식 여섯을 낳았소. 신랑은 술을 즐겼소. 세상 일이 뜻대로 안 되니 술기운으로 살았던게 아닌가 싶소.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의 술집마다 징검다리 밟듯이 들렀다 오곤 했소. 그러다가 덜컥 술병이 나서 작은방에 드러누웠소. 그 때 시부님은 중풍으로 안방에 누워 계신지 몇 년이 되셨소. 방마다 환자가 누워 계셔서 수발을 들어야 했소. 시모님은 바느질로 돈을 버셨고, 나는 종합식품 공장에 취직을 했소. 하루는 늦게까지 홍합작업을 하고 통근차로 마을 앞에 내리니 점빵집 안사람이 내 손을 맞잡고 이럽디다. “아지매가 세상을 베릿소!” “아침까지 멀쩡하셨는데 뭔 소리요!”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소. 아침에 시모님은 건너 동네에 죽음 옷을 바느질하러 가셨는데 저녁엔 차디찬 주검으로 돌아오셨소. 시모님 3년 뒤에 시부님도 뒤따라 가셨소. 3년 뒤에는 9년을 누워 지내던 신랑이 돌아가셨소. 3년마다 3번의 초상을 치고 나니 십년이 훌쩍 흘렀고 남겨진 건 빚밖에 없었소. 내 나이 쉰이 되었소. 스물 다섯 살 된 큰 아들이 이럽디다. “직장에서 받는 월급으로는 아버지가 남기신 빚을 못 갚겠으니 배를 타러 가야겠어요.” “네게 평생 못 갚을 빚을 지는구나. 부모노릇을 못 하니 이를 어이할꼬.” 큰 아들이 몇 년 동안 대구리 배를 타서 빚을 모두 갚고, 다시 자네한테 올라가려 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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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아들이 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돈 내외분과 다녀왔소. 1달 동안 여행하고 이야기하고 웃고 떠들며 즐겁고 행복했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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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님, 바다에서 거친 일을 하다 올라간 내 큰 아이를 조카로 다정히 맞아줘서 고맙소. 월급 따박따박 모아서 적금 넣고, 짝맞춰 결혼까지 시켜주었으니 참으로 고맙소. 큰 아들 서른 넘어도 짝을 못 맺는거 보면서 내 속이 숯검덩 보다 더 시꺼멓게 타 들어 갑디다. 어디선가 인연이 있을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에미 맘이 그리 느슨하던가요? 아우님이 삼각지 살던 작은 누이 경남이를 채근하여 중매를 섰고 내 맘에 딱 드는 며느리 얻었을 때, 내 등에 졌던 무거운 짐덩이 하나가 툭, 떨어져 내리는 맘이 들었소.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말이 있듯이 저거 아부지 술병으로 잃고 나니, 내사 술이 언짢아서 근처에도 가기 싫었소. 그런데 큰아들이 바다에서 고된 작업하며 술 담배를 배웠단 말을 듣고 가슴이 막혔다오. 혹시라도 건강 해칠까봐서 말이오. 세상 모든 에미들은 자나깨나 앉으나서나 자식 걱정으로 한이 쌓인다오. 아들이 장가들어 알콩달콩 잘 살면서 1남 2녀를 낳아 손주는 훤훤 장부로, 손녀 둘은 조신한 숙녀로 자랐으니 이 모두가 아우님과 올케 공이오. 내 며느리 자랑을 하면 팔불출이지만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꼭 해 주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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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아들 가족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오. 내가 존중 받고 사랑받는 기분이 참 뿌듯합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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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님, 내 둘째 아들 이야기 좀 할라요. 경탁이가 아우님을 젤로 많이 닮았소. 내가 평생을 돈벌이 하며 사느라고 자식들 학교엘 제대로 가 본 적이 있겠소? 소풍이나 운동회에 따라가서 도시락 펴고 웃으며 먹어본 기억이 없소. 자식들이 어릴 때는 방에 누워계신 두 환자 수발하고 돈 번다고 정신이 없었소. 둘째가 대학 졸업하고 다국적 기업에 들어갔소. 거기서 인정을 받아 부름을 받았답디다. “어머니, 회사에서 미국으로 들어오라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뭐 어떻게 하노? 먹고사는 문제만큼 중한게 어디 있다고?” “혼자 계신 어머니를 두고 머나먼 타국으로 가려니 발걸음이 안 떨어질 것 같습니다.” “우리가 네게 해 준게 없었다. 직장 잘 다니면서 니 앞가림 잘 하고 인정받고 살면 그게 효도인게야. 부모노릇 못해서 미안할 뿐이다.” “어머님이 저희를 엄하고 단단히 키우셔서 회사에서도 인정받고 칭찬 들으며 삽니다. 잘 키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렇게 떠난 작은 아들은 샌프란시스코에 잘 살고 있소. 몇 년 전에 사돈 부부와 저를 불러주어서 한 달 동안 미국 곳곳을 즐거이 여행하고 돌아왔소. 좋은 호텔에서 고급 음식 먹으며 별천지인 세상을 많이도 돌아다녔소. 내 평생 첨으로 수영복 입고 사람들 보는데서 물에 들어갔소. 그 뿐이겠소. 처음 해 보는 짓에, 먹는 음식에, 가는 곳에,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낯설어도 아들 부부가 옆에 있으니 부러운게 하나도 없습디다. 손녀 셋도 아비를 닮아 키 크지, 에미 닮아 얼굴 예쁘지, 영리하면서도 착하게 잘 키웁디다. 아우님, 딸 넷도 모두 가정 이뤄 부족함 없이 잘 살고 있소. 막내는 가까운 통영 산양면에 살면서 날 자주 찾아주오. 딸들 모두가 손끝 야물고 부지런하여 치사 들으며 산다오. 내가 늘 하던 부탁이 있었소. “사람을 겉으로 보면 안 된다. 그 속을 들여다 봐야한다. 인물 좋은거, 집안 살림 풍족한거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인물 뜯어먹고 사는거 아니고, 집안 살림은 하루 아침에도 잃을 수 있다. 사람이 성실하고 속이 야물고 따뜻하면 그게 최고인 게다.”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가르쳤더니 넷이 모두 그런 사위를 만나 잘 살고 있소. 지난 번에 올케가 와서 경남 아우와 내게 맛난거 사 주고 드라이브 시켜 줍디다. 시어머니 대하듯이 꼭 인사하러 오고 일 년에 두 번 이상 챙겨주니 내가 늦복이 많소. 아우님 가족들도 명절 되면 꼭 인사하러 오니 그 또한 고맙소. 사람의 인연과 팔자는 하늘이 내린 듯 싶소. 아무리 피해도 맺을 인연은 만나게 되고, 목숨은 하늘에 달렸으니 사람의 힘으로는 피할 수가 없는게요. 우리도 형제자매란 인연으로 태어나 지금까지 탈 없이 잘 지켜왔소. 아우님의 덕과 올케의 마음 씀씀이 덕분이라 믿소. 집안의 장손은 하늘이 내린다고 하오. 맏이가 잘 해야 집안이 무탈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소.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데 올케가 단도리를 잘 한 탓이기도 하오. 남정네가 아무리 형제 좋아하고 챙기고 싶어도 안사람이 틀면 어림없는 일이요. 모든 것이 안사람 손에 달린 거라면 우리는 올케 복이, 아우님은 처복이 있었던 거요. 아우님, 나도 몇 년 있으면 부모님과 시부모님과 영감님이 먼저 가신 그 곳으로 가게 될 거요. 가면 그동안 우리 살아왔던 이야기 재미있게 해 드릴라요. 모두가 칭찬해 주시지 않겠소? 그리고 내 이 말씀은 꼭 고할거요. “아버지 어머니, 공들여 낳아주신 우리 도경이가 재물도 모았고 사람도 모았고 좋은 소문까지 모아서 잘 살고 있소. 큰 나무되어 살고 있는데 그 그늘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 모른다오. 형제들, 자식들, 조카들, 사촌. 오촌들까지 모두 그늘 아래 깃들어 살고 있소. 우리 집안의 기둥이고 대들보 노릇을 얼마나 잘했는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잘 보고 와서 이리 고합니다. 모두가 부모님의 공덕입니다. 참으로 고맙고 고맙습니다.” 우리 사는 날까지 서로 변치말고 지금처럼 지냅시다. 아우님께도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오. |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0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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