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2025-07-01 21:45:34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원격
뉴스 > 사람 사는 이야기

내 생을 탁본으로 떠 대가저수지 위에 물수제비로 띄우면 저 맞은편에 누군가가 마중 나와 주면 참 좋겠네

최관호 대가면 유흥리 삼계마을(87세)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0년 09월 04일
↑↑ 원두막에 앉아서 흘러간 세월을 다 담고 있는 대가저수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면, 생이 물비늘처럼 일렁인다.
ⓒ 고성신문
저수지 물빛이 맑다. 그 위에 구월을 등에 업은 온유한 바람이 불어온다. 물결은 은어의 비늘처럼 햇살에 번뜩인다. 바다의 윤슬처럼 큰 파장으로 일어나는 반짝임이 아닌 살짝살짝 드러나는 은유의 몸짓이다. 식물들의 몸피는 가벼워지는 중이다. 위로 생성하는 물관을 막고 이제는 열매를 익히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벼들은 알곡을 여물기 위해 온 몸의 힘줄을 한 곳으로 집중한다. 논둑에 납작 엎드렸던 달팽이가 벼들의 근심을 온통 짊어졌으니 이제 태풍만 피해가면 될 터이다.
누군가의 삶을 기록하러 가는 길, 오늘은 또 어떤 세월이 파노라마로 펼쳐져 깊은 울림으로 다가올까, 설레면서도 발걸음이 진지하다. 나는 대가저수지를 지나쳐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는다.
최관호 님은 대흥초등학교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사신다.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에 ‘田園生活의 꿈을 향하여’란 비석을 세웠다. 《선조들의 혼이 묻힌 곳, 내가 태어난 여기가 고향이기에 산천은 빼어나고 자연은 아름다워라. 이곳이 나와 나의 자손들이 영원히 살아갈 터전인지라, 1983년 3월부터 3년에 걸쳐 조상 대대로 이어온 전답의 둑을 공직생활의 여가를 틈내어, 온갖 열정을 다하여 농장으로 정리한 그때가 엊그제 같건만, 어언 30여년의 세월이 흘렀구나. 녹차, 오미자, 산수유 꽃 피는 아름다운 이 정원을 나의 후손들이 영원한 보금자리로 삼아 지켜나가기 바라면서 이 글을 남긴다. 2013년 3월 1일 水晶 최관호 쓰다》 이 비문에 그의 인생역정이, 좌우명이, 뜻한바가, 희망사항이 모두 들어있다. 더 이상의 문답이 필요 없을지라도 우리네 생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으니, 나는 또 인터뷰어의 자세가 된다.

-삶이란 무엇인가요?
-저수지의 물결 같은 것이요.
-물결은 또 무엇인가요?
-조금씩 일렁이되 본질은 변함이 없는 거요.
-본질은 무언가요?
-존재하는 것.

선문답 같은 질문을 주고 받으며 원두막에 앉았다. 누군가 내게 같은 질문을 했다면 뭐라고 답했을까, 저수지 근처에 살아본 적이 없는 어부의 딸인 나는 이렇게 답을 했을지도 모른다.
‘삶이란 거친 바다에 출렁이는 파도 같은 것이며, 어떤 바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좌표가 달라지고, 멀리서 보면 잔잔해 보일지라도 가까이 닿으면 쉼없이 흔들리고 있다. 그게 살아있음의 증거다.’ 결국 맥락은 같다. 누군가 자신의 삶이 ‘고인 물처럼 잔잔했노라’고 말했다 치자. 그 잔잔함을 증명하는 방법은 무엇이며, 잔잔함의 기준은 무엇으로 정할 것인가. 따지지 말고 살아온 개인의 표현 자체에 의의를 두어야 할 뿐이다. 논리적으로, 문법적으로, 객관적으로 따위의 낱말을 들이대 누군가의 삶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 물결 같은 삶에 대해 좀 더 말씀해 주세요
저수지의 물결은 멀리서 쳐다보면 평온하고 변함없는 모습인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물살이 일렁이오. 햇살의 주문에 따라 그 빛깔도 달라지고, 바람의 강도에도 쉽게 반응하는, 가볍고도 변화무쌍한 것이요. 내가 생각하는 삶이란 그런 것이요. 남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내면에는 활화산처럼 용암이 끓는 활동성이 있소. 그런데 현실에 부대끼며 살다보면 잊어버리거나 쉬이 좌절하여 그 자체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요.

#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가요?
그걸 왜 내게 묻소? 사람마다 다르지 않소? 천 사람이 만 가지 대답을 해도 모두 동그라미요. 저마다 제각각의 빛깔로 살아가는 인생인데 거기에 답이 어디 있겠소.

# 잘 살아오신 게지요?
총기가 나날이 떨어지는 것이 슬프오. 올 봄엔 예초기를 지고 풀을 베었는데 여름엔 마당의 잔디도 깎기 싫어집디다. 내 모습이 ‘처서 지나 덤불 밑이 훠~언해진’ 풀숲 같아서 섧소. 그래도 내 지나온 마디마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으니 후회는 없소.

# 제가 보기엔 여전히 좋아 보이시는데요?
그리 말해 주니 고맙소. 곧 아흔을 바라보는데 세상살이에 더 이상의 욕심도 부러움도 없소. 작년에 색소폰을 마련하여 기본만 익혔소. 겨우 계이름 정도만 부를 줄 알게 되었소. 어떤 이는, 폐활량이 필요하고 어려운데다 이 나이에 악기가 뭔 해당이냐며 핀잔을 줍디다만 못 불면 어떻소. 내가 하고 싶으면 내 마음을 쫒아서 하면 되는 거지요. 잘 불고 못 불고가 어디 있겠소. 머리맡에 얹어두고 쳐다만 봐도 친구처럼 위로가 됩디다. 첨단 기기를 사용할 줄 알고, 스마트폰을 활성화하여 카톡을 주고받고, 인터넷 서핑을 즐기며 세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소. 신체는 세월을 따라가되 마음은 활기차고 밝게 살고 싶소.

↑↑ 소년에서 청년으로 이어지던 그 시기, 가난과 노동은 필연처럼 우리를 따라다녔다.
ⓒ 고성신문
# 평생 여기서 사신 건가요
그렇소만 태어난 곳은 의령경찰서요. 조부님이 꼿꼿하고 타협을 못하는 성정이시라 잦은 법정 시비가 있었고 내 모친이 만삭의 몸에 의령경찰서에 증인으로 입회를 하셨는데 그 과정에 출산하셨다 하오. 힘들게 해산하고 조부님 뒷바라지까지 맡은 모친은 내가 아홉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소만 나는 국민학교에 계속 다녔소. 4학년 1학기까지 일본인 교사 밑에서 일본 말로 공부를 하다가, 그해 8월 15일에 해방이 되었고 그 때부터 한글로 공부를 하게 되었소.

# 모친과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요
외가인 송계마을로 가려면 장밭곡을 넘어야 했는데 하루 두 번 버스가 있었소. 차는 목탄엔진으로 움직였는데 오르막에서는 승객들이 모두 내려서 버스 뒤를 힘껏 밀어야 했소. 장밭곡까지 사람들이 밀어올린 버스를 다시 타고 외가에 갔던 일이 선명하게 남아 있소. 모친 장례를 치르는 현장에서 사자상(使者床)에 차려놓은 과자를 안 준다고 떼를 쓰는 철없는 어린 생질을 보며 외삼촌이 통곡한 일이 있었다고 들었소. 외가 가는 버스에서 일어났던 일 말고는 생모와의 기억이 별로 없소. 모든 게 아쉬울 뿐이오.

# 어린 시절은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동갑인 영춘이, 용환이, 태호와 연날리기 팽이치기 자치기 짚풀 공차기 그네뛰기를 하며 신나게 놀았소. 시꺼먼 보리쌀로 지은 아침을 먹고 나가면 해가 질 때까지 동무들과 놀았소. 온 동네를 휩쓸고 다니면서 개구쟁이 짓도 많이 했소. 저수지에서 멱을 얼마나 감았는지 모르오. 이 둑에서 저 둑까지 개구리 헤엄으로 건너가다가 지치면 물 위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곤 했소. 햇살은 눈이 부셨고 구름이 지나가다가 이불을 덮어주면 고마워서 윙크를 보냈지요. 위험하다는 개념도 없었소. 어쩌면 무서워하지 않았기에 더 당당히 건너갈 수 있었던게 아니었나 싶소. 같이 자란 동무들도 뿔뿔이 흩어져서 지금은 소식을 모르오. 어린 시절 모습은 눈에 선하나, 지금은 어찌 변했을지, 살아있는지도 모를 일이요.

# 중학교는 고성읍내로 나가셨겠어요
1948년 9월에 고성농업중학교에 입학을 했소. 입학 당시는 초등6년 중등5년 학제였소. 한 학년에 4학급, 한반에 60명 정원으로 240명이었소. 6㎞쯤 되는 고성읍 교사리까지 비가 오면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입고 고문신을 신고 걸어다녔소. 1950년에 전쟁이 났고 우리 동네 사람들은 꼬드랫골과 골안으로 피신을 했소. 학교는 신병교육대의 훈련장으로 빼앗겼고 우리는 학교 앞 마을회관이나 문중 종실을 빌려 공부를 했소. 그즈음 정부의 방침으로 초등6년, 중등3년, 고등3년이란 학제가 다시 제정되었소. 중학교 과정중에 학제가 바뀌어 3학년을 마치고 졸업을 하게 된 거요. 

# 편하게 공부만 하신건 아니죠? 그 시절엔 농사, 놀기, 공부하기 이런 순서 아니셨던가요?
중학생 때는 부친의 농사일을 많이 거들었소. 학교 다녀와서 소 먹이고 소꼴 베는 일은 주로 내 몫이었소. 부친이 논일 하는데 중참(막걸리 농주)을 갖다 드리는 심부름을 하다가 드시고 난 빈 주전자 꼭지를 자주 빨다가 술을 배웠소. 한 달 수업료는 곡식 열다섯 되를 팔아야 마련할 수 있었는데, 잦은 미납으로 학교에서 쫓겨 집으로 돌아오곤 했소. 그런 자식의 뒷모습을 보며 부친은 자주 눈시울을 붉혔소. 졸업을 하고는 농사일을 거들었소. 공부를 더 하고 싶었으나 뻔히 아는 가정형편상 조를 수 없던 일이요. 잠시 갈망골의 구곡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소. 천자문, 사자소학, 동몽선습, 명심보감, 소학, 이렇게 단계별로 올라가는 학문인데 그동안 내가 익힌 게 있어 4단계에 속하는 명심보감을 익혔소. 그 때 익힌 한문이 훗날 내가 사회생활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소. 그즈음 농지 개혁법이 제정되었는데, 소작농은 10년간 분할상환으로 벼를 공출로 바치면 완납자에게 농지를 분배한다는 거였소. 우리 농지는 통영 김형장이란 부자지주의 논이었기에 1년 내내 농사지어 상환곡으로 공출하고 나면 겨우 양식이 될까말까 하는 형편이었소. 당시엔 살림이 어려웠으나 농지개혁법의 적용으로 우리 집은 농지를 분배받았고 살림이 조금씩 나아졌소.

↑↑ 제복이 멋있어서 고민없이 선택한 해군의 길,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세상이 그 곳에 있었다.
ⓒ 고성신문
# 그 시절의 농사법과 농촌 생활에 대하여 자세히 듣고 싶어요
아침 일찍 큰곡 양달에 소를 몰아놓고 풀지게를 지고 풀을 베어 거름을 만들었소. 못자리를 만들고, 모를 기르고, 어느 정도 자라면 모를 쪄 바지게에 담아 논으로 날라 모내기를 했소. 논바닥에 여러 사람이 엎드려 줄을 맞춰 심어야 했으므로 품앗이가 필요했소. 이집 저집 품을 앗아 모를 다 심으려면 한 달 가까이 걸렸소. 무논을 누가 빨리 만드느냐에 따라 순서가 정해지므로 부지런해야 했소. 저수지 물을 댔지만 더러는 웅덩이 물을 퍼 올리거나, 윗논의 물꼬를 터서 물을 빌리기도 했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물은 생명줄이요. 한 해의 논농사는 모내기철에 얼마만큼의 비가 내리느냐에 따라 결정되었소. 물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소. 물을 함부로 대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나무라는 것도 이 때문이오.

↑↑ 고성군청 농정계에 근무할 때, 저수지 물을 퍼 올리며 해갈의 방법을 함께 연구하고 고민했다.
ⓒ 고성신문
# 이야기를 하다보면 끝도 없이 이어지고, 한 사람의 삶에도 엄청한 이야기가 들어있네요. 중학교 이후의 이야기를 풀자면 책 1권으로도 모자랄테니, 나머지 이야기는 또 남겨두고, 저수지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우리 집 텃밭에서는 대가저수지가 다 보였소. 나는 내 마음속에 돋는 이야기를 저수지에 써 내려가곤 했소. 살다보면 많은 감정이 내 것이었다가, 남의 것이기도 하잖소. 젊어 한때는 울분에 쌓이거나 말 못할 고민으로 힘들 때 저수지에 낚싯대를 드리우며 내 마음을 다스리곤 했소. 지금도 장성한 자식들이 그립거나 내 곁을 먼저 떠난 할멈이 생각나면 저수지에 나가오.

# 수십 년의 세월 속에 담긴 이야기는 건너뛰어도 부인 이야기는 좀 해 주세요
할멈이 작년에 세상을 떠났소. 돌이켜보면 미안함이 참 많소. 10여 년간 젖소를 키웠소. 축우는 새벽 4시부터 밤11시까지 노동의 시간을 필요로 하오. 그 일들은 할멈이 있어서 가능했소. 일에 치여 어느 하루 편안히 나들이 가 본 적 없는 나날을 살았소. 자식들도 제 앞가림 잘 하게 키웠고, 세상 둘도 없는 좋은 안사람이었소. 지상에 함께 살았을 때 ‘고맙소, 사랑하오!’란 말도 못해주고 떠나보낸게 내 평생의 한이 되었소. 지금이라도 그 말 해주고 싶소.

#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도 있으시죠?
우리 대문 앞의 비석에 할 말 다 해 놨소. 사람에게는 종족 본능에 욕심이 있소. 족보와 제실을 만드는 일도 모두 자신의 뿌리를 잊지 말고, 근본을 지키는 삶을 살라는 뜻이오. 나는 큰 아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제실을 관리하고 고향 땅을 지키며 살아가길 바라오. 같이 심었던 오미자와 산수유 나무를 잘 돌보아 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소. 물론 모든 것은 본인의 선택이지만 부모니까 이런 욕심을 부려보는 게요.

# 열심히, 공들여 만든 저 민화들은 어쩌실 건가요?
축사를 개조하여 쉼터를 만들었소. 민화와 불화 원본을 구해, 나무에 그림들을 새겨 넣고 그리는 작업을 오래토록 했소. 한 점 한 점이 나의 살점같이 소중하건만 이 또한 지나가는 형상으로 남지 않을까 싶소. 안채에 앉았다가 이 쉼터를 자주 들여다보곤 한다오. 예전에 키우던 소들의 순한 눈망울이, 부지런한 발자국이 눈에 선하오. 그들이 살다 간 자리가 폐허가 되지 않고 그림으로 채워졌으니 얼마나 다행이오?

# 참 부지런히 살아오셨네요. 그 삶에 박수를 쳐 드리고 싶어요
고맙소. 누구한테 박수 받자고 열심히 살아온 건 아니오. 다만 가만히 앉아서 소일하지 못하는 내 천성 때문이고,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서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소명을 잊지 않으려 했을 뿐이오. 늙은이를 찾아와 주고,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기록으로 남겨준다니 고맙소.

대문을 나와 저수지를 돌아 나오는 길, 고추잠자리들이 떼지어 날고 있다. 잠자리 날개 속에 든 여린 무늬가 아른하다. 우리네 삶도 저렇게 가차 없는 그물코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게 아닐까. ‘인연’이라는 보이지 않는 질긴 끈으로 이어져, 나와 너, 너와 우리, 그리고 함께로.

 
ⓒ 고성신문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0년 09월 04일
- Copyrights ⓒ고성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네이버블로그
이름 비밀번호
까망가방
고성 신문에 연재된
 "남외경의 사람 사는이야기" 를 주욱 훑어 읽어보면서
살아가는게 별겐가 , 지나고 보니 그게 살맛이었노라 하는 표정들이십니다.
그간에 살아오면서 애간장 태우며 고생한 이야기야 어찌 다 말로 할수 있으랴
그래도 한세월 살고난후 이만하게 살아옴도 감사하고 복받은것 같이
긍정적으로 여기시는 어르신들의  모습에서 진솔함을 봅니다.
그 어르신들의 질곡의 세월을 남외경 작가님께서 소박하게 풀어주셔서
마치 제가 그 언저리에 있는듯한 착각이네요.
잘 보고 갑니다.
09/05 17:02   삭제
개인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포토뉴스
가장 많이 본 뉴스
만평
상호: 고성신문 / 주소: [52943]경남 고성군 고성읍 성내로123-12 JB빌딩 3층 / 사업자등록증 : 612-81-34689 / 발행인 : 백찬문 / 편집인 : 황수경
mail: gosnews@hanmail.net / Tel: 055-674-8377 / Fax : 055-674-8376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남, 다01163 / 등록일 : 1997. 11. 10
Copyright ⓒ 고성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함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백찬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