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세월에 담긴 인생역정이 대단하면서도 거룩하다 누군가의 삶인들 소중하고 귀하지 않으랴
최정호 대가면 출신(85세)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0년 0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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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사색하고 글을 쓰며 사는 일상의 나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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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 다섯의 연세에도 날마다 책을 읽고 글을 쓰시는 분이 계신다. ‘어쩌면 20년 뒤의 내 모습을 엿볼 수 있을거야.’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초인종을 눌렀다. 최정호님은 1936년 丙子생이다. 여전히 자세는 꼿꼿하고 당당하시다. 약속을 정하고 댁으로 찾아뵈었을 때 책이 잔뜩 쌓인 거실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져 계셨다. “요즘은 무슨 책을 읽으세요?” “손에 잡히는 대로 읽고 있소. 지금은 세계사를 읽는 중이요.” “뭔 이유라도 있는지요?”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세계사를 다시 살펴보고 과거의 일들을 찬찬히 짚는 중이오” “뭔가 새로운 발견을 하셨는지요?” “유럽에서 발생한 흑사병, 콜레라, 황열병 등의 발병과 치료법, 인류의 대처 방법에 대하여 알아보고는 있지만, 이번 바이러스와는 다른 것 같아서 뭐라고 말하기 어렵소.” 나도 읽은 적 있는 책이지만, 다시금 세계사를 들춰내어 역사를 되짚기에는 내가 바쁜지 게으른지 모르겠다. 많은 정보를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얻는 세상에서 독서를 통한 사색이 단연 돋보이는 이유는 뭘까? 시력도, 기억력도 흐릿해지실 연세에 책을 읽으며 과거와 현대의 질병을 비교하는 모습이 대단하다.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이 느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독서의 가치에 대한 확인일게다. “최근에 내신 책 ‘현대 생활 시사용어’ 2020 증보판에 대하여 이야기 좀 해 주세요. 지난 2013년 ‘현대 시사 용어집’을 출간 한지 7년 만에 개정판을 발행하여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눔 하는 일이 쉽지 않은 사건이기도 해서요.” “시사용어는 시사상식의 하나이며, 시사상식은 잡학이나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국내외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를 이해하는데 키워드가 되고 판단력의 기본이 되는 토양이며 사고력을 키워주는 종잣돈이라고 할 수 있소. 내가 오랜 공직생활을 하면서 수 없이 사용해 왔던 행정용어와 시사용어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려운 단어들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소. 정리를 하다 보니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아쉬워서 책으로 만들게 된 거요.” 어린 시절 이야기를 여쭤보았다. 유년의 기억이 평생의 삶에 특별한 방향 설정을 하는 경우가 많다. 최종호님의 어린 시절과 독서, 그리고 책을 출간하기까지와 과정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작용하고 있는지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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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님 회갑연에 찍은 사진, 훗날 만나뵈면 내 살아온 뒷 얘기를 마저 들려 드려야지.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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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가면 유흥리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소. 여느 농촌과 별반 다름없는 가정이었으나 농사를 거들며 힘쓰는 일은 주로 형과 누님들의 몫이었고, 나는 편히 자랐다고 볼 수 있소. 먼 길을 걸어 초등학교를 다녔소. 동구 밖을 나서면 고개가 이어졌고, 고개 중턱에 공동묘지가 있었소. 친구들과 책보따리를 던져놓고 언덕에서 미끄럼을 타거나 말뚝박기, 비석치기, 자치기 등을 하며 놀았소. 봄이면 삘기를 뽑아서 그 속의 얇은 내피를 씹었고, 찔레꽃이 피면 연한 새 순을 벗겨 먹었고, 혓바닥이 보랏빛으로 물들도록 진달래도 따 먹었소. 따끈한 볕을 등에 지고 걷던 시골길을 그런 장난 없이 어찌 견뎠으랴 싶소. 대부분의 친구들이 초등학교를 마치고 도회의 공장이나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우러 지게작대기를 두드릴 때, 나는 막내의 특혜를 톡톡히 입었소. 형과 누나들이 저마다 몫을 다했기 때문이오. 부모님은 자식들 모두 제대로 공부시키지 못한 아쉬움과 미안함을 막내인 내게 쏟으셨소.” “그럼 중학교는 어디로 진학을 하신 건가요?” “나는 고성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소. 다행히 학교까지의 거리가 6㎞ 정도였으므로, 아침 첫차를 타고 읍내까지 통학을 했소. 나는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고, 어머님은 자신의 한까지 쏟아 부어 나를 아낌없이 뒷바라지 해 주셨소. 내 부친은 일제 감정기 때 일본으로 돈벌이를 떠난 분이셨고(고성에는 가까운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돈벌이를 나선 분들이 의외로 많았다) 해방 직전 돌아오셨지만 제대로 된 기술을 익힌 것도 아니셨고, 농사일도 서툴러 모친의 고생이 깊으셨소. 모친은 일에 지치면 지청구를 늘어 놓으셨지만, 내게는 힘든 일을 시키는 대신 책 읽는 모습을 원하셨소. 식구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에도 모친은 물레를 잣으셨고 나는 그 옆에서 호롱불 아래 책을 읽었던 거요. 졸업을 하고는 인근의 고성농고(현, 경남항공고)로 진학하여 3년 내내 전교 1~2등을 다퉜지만 대학갈 형편이 못 되었소.” 그 시절, 대학은 우골탑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다. 시골에서 대도시의 대학으로 유학을 시키는 일은 흔치 않았고,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지(집이나 땅을 처분한다든지)나 특별히 다른 직업으로 돈벌이를 하지 않으면 꿈꾸기조차 어려웠다. “1956년 고교를 졸업하니 담임선생님이 해군사관학교를 추천해 주셨소. 그 당시 사관학교의 신체 검사 기준이, 흉위가 신장의 2/1 이상이 되어야 했는데 나는 그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소. 나는 해군제독이 되고 싶은 꿈을 꾸었기에 신체검사에서 떨어진 사실에 충격을 받았소. 곧바로 군에 자원 입대를 하여 59년에 제대를 했소. 그 해 12월, 고성읍내에서 ‘백수당한약방’을 운영하시던 장인의 눈에 띄어 혼인을 하게 되었소. 마침 양쪽 집안을 잘 알던 중매장이가 ‘대가면에 머리 좋은 총각’이 있다며 한약방에 소개하셨고, 장인어른의 부름을 받아 갔더니 몇 가지를 물어보시곤 바로 사위로 낙점을 받았소. 다음 해, 경상남도 지방공무원 공채 1기생으로 합격하였소. 그 당시 30명 선발에 응시생이 3천600명이나 되었기에 120대 1의 경쟁률을 확인하고는 자포자기 상태에서 시험을 쳤기에 합격의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소. 첫 발령지는 거제군청이었고 3년을 근무한 뒤 고향인 고성군청으로 전보 발령받았소. 거제에서 출산한 큰 딸은, 동국대 한의대를 졸업한 사위와 혼인하여 지금은 부산에서 한의원을 운영 중이오. 장인의 과업이 외손주한테 이어지고 있으니 소원풀이를 하셨다고나 할까요? 돌아가신 장인이 참 좋아하셨소.” “밥벌이를 할 수 있으셨군요. 그 때부터 퇴직할 때까지 대한민국 공무원으로 살아오셨으면 얼마나 긴 세월인지요? 공무원 하실 때의 이야기 좀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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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6월. 제19대 대가면장 퇴임식으로 공무원 생활의 막을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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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부터 97년까지 37년간 공직에서 근무를 했소. 농사계에서 9년 동안 근무하며 농업 기계의 보급에 앞장섰고 새마을사업의 붐이 일어날 때는 지붕개량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소. 마지막으로 고향인 대가면장으로 5년을 근무한 뒤 정년퇴직을 했으니 공직생활에서도 더 이상의 여한이 없소.” “퇴직 뒤의 생활이 궁금합니다. 공무원 시절과 비교하여 어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든가요?” “공무원을 그만두고는 친구들과 어울려 외국 관광을 많이 다녔소. 공무원이란 쇠사슬에 묶여 우리 속에 갇혀 지내다가 세상으로 나오니 참으로 홀가분 했던거요. 그 당시는 산불이나 홍수와 산사태도 모두 공무원의 책임이었소.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까지 공무원 탓이었으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세월을 살았던거요. 세계 20여개 나라를 여행 다녔지만 그래도 시간이 많이 남았소. 그래서 펜을 잡았고 신문과 방송에서 나오는 시사 용어를 정리하여 사전처럼 풀어쓰는 일을 시작했소. 나도 모르는 낱말들이 많았고 새로운 용어들을 찾아보는 일에 점점 재미를 붙였던게요. 그 당시 동아일보사에서 나온 ‘시사용어 사전’ 뿐, 개인이 발행한 책은 없었소. 노트에 본격적으로 필기를 시작했는데 볼펜 15자루를 다 쓰는 동안 내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혔소. 그리하여 2013년 ‘생활 시사 용어’라는 제목의 책을 초판 발행하게 되었소.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 몇 년이 지나니 새로운 용어들이 쏟아져 나왔고 나는 그동안 모집했던 단어들을 다시 묶어 개정판을 내게 되었소. 2020년은 나에게 특별한 해라고 할 수 있소. 그렇게 발행한 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고 내 삶의 회한을 정리하는 중이니.” “돌이켜보면 선생님의 인생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네요. 부모님 슬하에서 자란 스무 다섯 살까지의 초반기, 공무원으로 살던 중반기, 퇴직 후 공부를 하고 책을 낸 하반기로 나누면, 그 시기마다 삶은 의미와 보람의 세월을 살아오셨군요.” “그렇소. 부모님의 은혜로 고등학교까지 무탈하게 공부했고, 대과(大過)없이 공직 생활을 마무리 하였기에 다행이었소. 퇴직 하고나서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지식을 연마하며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두 권 펴냈으니 보람 있소. 내 큰 형은 6.25 참전 유공자로, 둘째 형은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서 전사하시어 화랑무공훈장을 받으셨소. 총각의 몸으로 전사한 혼령을 위로하고자 죽은 처자와 영혼결혼식을 올리며 하염없이 눈물지으시던 내 모친의 모습이 아련하오. 나도 공직을 마무리하며 훈장을 받았으니, 우리 3형제 모두가 훈장 및 증서를 부모님 영전에 바치게 된 점도 자랑스럽소. 내 부모님은 10남매를 낳으셨고 절반을 잃는 아픔을 겪으셨지만, 세 아들이 나라를 위한 애국자로 인정받았으니 뿌듯하셨을 거라 믿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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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사진. 자녀 넷의 부부와, 각기 두 명의 손주를 낳아 화목하고 평화로운 대가족을 이루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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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으로서 부모님 영전에 자랑스러움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을까요? 삼형제 이야기를 들으니 저도 뿌듯하네요. 이제 자녀들 이야기 좀 해 주세요.” “1남 3녀의 내 자식들도 저마다의 가정을 이뤘고 식구들 건사하며 잘 살고 있으니 이만하면 내 삶, 회한도 후회도 없소. 자식들에 대한 기대야 모든 부모의 공통된 욕심 아니겠소. 내가 이 나이 되고 보니, 자신의 일 열심히 하고, 가족과 화목하고, 웃으며 건강하게 사는게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 싶소. 나는 내일 아침에도 일어나면 책을 펼 것이고, 모레도 글피도 남아있는 내 생을 책갈피에 쌓을 것이오. 돌이켜보니 내 삶은 첫 페이지의 연필 자국부터 볼펜의 심을 거쳐, 이제 잉크냄새로 마무리를 하고 있소. 남은 나날이 다시 기록으로 새겨지지 않는다 한들 무슨 아쉬움이 남겠소.” 인터뷰를 하고 대문을 나섰다. 아파트 1층까지 바래다주시며 조심히 가라고 다정히 이르신다. 지금까지 수십 쌍의 결혼식 주례를 해 주시면서 어떤 덕담을 해 주셨을지 알 것 같다. 성실하고 진지하게 살라 이르셨겠지. 인생길에 숨은 여러 가지 그림을 골고루 살피며 들여다보라 이르셨겠지. 누군가의 삶을 엿보는 일은 내 마음이 오히려 따뜻하게 데워지는 경험이다. 85년의 세월에 담긴 인생 역정이 대단하면서도 거룩하다. 누군들 소중하고 귀하지 않으랴. 창 밖엔 햇살이 뜨겁다. 여름은 뜨거워야 제 격인 것을! 우린 또 여름을 견뎌야 실한 가을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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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0년 0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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