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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사람 사는 이야기

아쉬움은 모두 묻고 좋은 일만 기억하면 될 일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 이만하면 되었다

동해면 매정마을 최한수(1937년생 84세)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0년 06월 19일
↑↑ 집안 조상님들을 모신 추모동산에 올라 마을 앞 바다를 바라보니, 살아온 나날이 꿈결처럼 아득하다.
ⓒ 고성신문
# 2020년 윤사월 어느 날
아침 일찍 추모동산에 올라갔다. 추모각의 문을 열고 묵념을 한 뒤 6대조까지 모신 산소를 둘러보았다. 추모동산 건립과 족보 제작에 애썼다고 종중에서 공적비를 세워 주었다. 비석의 감촉이 특별하다. 이 속에 내 삶의 모든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다른 집안의 여러 사람들도 와서 둘러보고 갔다. 특히 바닥을 보도블럭으로 처리하여 벌초하는 일손을 덜게 한 점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풀이 무성하지 않으니 벌초에 힘을 쓰지 않아서 좋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크고 넓고 편리하고 아름답게 가꾼 집에서 살려 하지만 돌아가신 분들의 집은 다르다. 볕 잘 들고, 후손들이 찾아오기 쉽고, 조상님들 함께 모여 다붓하게 지내면 좋을 듯 싶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고향 땅, 물 빠짐이 좋은 곳에 추모동산을 마련하게 되었다. 살아생전 내 할 일은 다 한 듯싶다. 올 때마다 마음이 편안하다. 사월에는 네 번, 오월에는 다섯 번을 올랐고 유월 들어 벌써 여섯 번째다. 올 때 마다 방명록에 기록으로 남긴다.
날 두고 먼저 떠난 집사람 비석에 가서 묻는다. “그 곳에서는 행복하시우? 날 기다리고는 있수?” 집사람은 무슨 대답을 해 줄까? ‘영감님 혼자 두고 와서 미안하오. 용서해 주시구랴~’ 이렇게 말할까? 이 나이에 따지고말고 할 것이 무어란 말인가. 그냥 하루하루를 봄날의 이슬비같이, 여름날의 한 줄기 바람같이, 가을날 곱게 물드는 단풍같이, 겨울날 언덕에 쏟아지는 볕살같이 살다 가면 될 것을.

↑↑ 동해면 갑장 모임에서 떠난 나들이 길, 절반 이상은 세상을 떠났다.
ⓒ 고성신문
# 2020년 윤사월 보름 날
달이 훤하다. 창문을 열고 마당을 내다보니 달빛이 메밀꽃처럼 쏟아진다. 모내기를 끝낸 논에 개구리들이 무시로 울어댄다.
70년 전의 그 밤처럼, 달빛 환한 초여름 풍경은 한결같다. 중학생때 심훈의 ‘상록수’에 심취하여 밤 새워 책을 읽었다. 채영신과 박동혁은 농촌 계몽 운동에 뛰어들어 논과 밭을 일구듯 조선인의 마음속에 희망을 심으려 했다. 「우리의 붓끝은 날마다 흰종이 위를 갈며 나간다. 한 자루의 붓, 그것은 우리의 쟁기요. 유일한 연장이다」 이 글귀는 지금도 내 가슴에 선연한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 먹지도 마라, 우리를 살릴 사람은 우리 뿐이다’ 인두에 데인 화인처럼 남아있는 문장이다.
동해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거제의 해양소년단에서 2년을 공부한 뒤 부산으로 유학을 갔다. 함남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부지런히 공부했다. 집에서 보내주는 돈은 집세며 학비며 생활비를 충당할 만큼 넉넉하지 못해 늘 배가 고팠다. 보내준 쌀 중 절반은 팔아서 용돈으로 쓰고, 밀가루 풀대죽을 쑤어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이 떠오른다. 학교를 졸업하면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진지하게 토론하고 꿈을 꾸었다. 도시 출신의 친구들은 사업이나 장사에 뜻이 있었고, 책을 좋아하던 친구들은 상급학교 진학을, 농촌으로 돌아가서 계몽 운동을 하며 농사를 짓겠다던 사람은 나 혼자였다. 가난하고 피폐한 농촌보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많은 도시에서 훗날을 도모하자던 친구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나는 농촌으로 다시 돌아왔다.

↑↑ 먼저 간 집사람은 마음 넉넉하고 후덕하고 반듯했다. 한평생 내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주었으니 고맙기 그지 없어라.
ⓒ 고성신문
↑↑ 큰사위를 맞고 사돈댁 초대를 받아, 한껏 멋 부린 집 사람과 제수씨들, 맏딸 내외
ⓒ 고성신문
# 2020년 윤사월 열아흐레 햇볕 쨍쨍
아침 일찍 텃밭에 나가서 늦마늘을 뽑았다. 올해는 작황이 좋다. 마당에 널어 잘 말렸다가 딸들에게도 주고 김장에도 사용할 것이다. 대문 앞 무논에 볕이 수직으로 꽂힌다. 논의 물은 분명 흙탕물인데 햇살이 닿으니 빛이 난다. 물보다 빛이 강해서이다. 우리네 삶에도 주장이 강하거나 자기 색깔이 분명하면 반사되어 튄다. 내 삶은, 받아주고 스며들게 하는 물이었는지, 강렬하게 번지는 빛이었는지 생각해 본다. 내게 주어진 운명과 기회와 사람을 모두 받아 순응하며 살았으니 물처럼 살아온 지난 날이다. 더러는 상대방의 의견을 되받아치고 내 주장을 꼿꼿이 내세우며 맘대로 살았으니 빛처럼 살아온 나날이다. 이젠 그 둘이 합해져서 내 나이 여든 넷을 씨실과 날실로 엮었다. 내 삶의 직조는 완전하지 못하다. 군데군데 엉성하고 구멍도 나 있다. 그래도 어쩌랴, 이것이 내 삶인 것을. 세상의 어떤 사람도 자신의 삶이 완벽한 완성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빈 곳, 허망한 곳, 찢어진 곳은 있기 마련이니까. 한낮이 되니 볕이 뜨겁다. 차를 한 잔 마시고 조금 쉬어야겠다.

# 2020년 윤사월 스무이튿날 흐림
경기도에 사는 큰딸과 사위가 내려온단다. 미용일로 바쁜 딸과, 부동산 관련 일을 하는 맏사위는 정도 많고 부지런하다.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반가운 손님이다. 횟집에 미리 부탁하여 자연산 생선회를 넉넉히 주문했다. 텃밭의 상추를 뜯고 부추도 잘라왔다. 큰딸이 좋아하는 방아도 연한 잎으로 땄다. 밤 늦게 큰딸 내외가 도착했다. 멀지 않은 시댁에 들러 시부모님께 문안을 드렸다니 마음이 놓인다. 딸을 가진 부모는 아무래도 사돈댁에 마음이 쓰이기 마련이다. 당연히 먼저 들러 인사를 드려야 하는 곳이다. 자주 못 찾아와 죄송하단다. 나는 딸의 마음을 다 안다. 부모는 자식을 품었고 길렀고 평생을 마음에 담은 존재이므로 자식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곧이어 두 딸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둘째는 다음 주에 내려온단다. 여름옷과 반찬과 보약을 챙겨온다고 애교를 부리더니 전화를 끊었다. 여성이 일하기에 쉽지 않을 건축업에 종사하여 나름대로의 성과를 이루었다니 장하다. 사위와 손을 맞잡고 서로 의지한다니 다행이다. 성향에 안 맞을까 싶어 염려스러웠는데 의외로 능력을 발휘한다니 고맙다.
부산에 사는 막내는 2주에 한 번씩 온다. 거리상 자주 올 수 없는 두 언니가 막내에게 이것저것 챙기라고 당부하는 모양이다. 냉장고에 온갖 것을 쟁여주고 간다. 안 잊고 잘 먹는지 챙긴다. 혼자 지내는 아비가 걱정되어 딸들은 매번 걱정을 보낸다.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보탬이 되어야하는데 오히려 염려를 주어 민망하다. 늙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짐이 되기는 싫다.

↑↑ 무인산간을 개간하여 참깨 농사를 지었는데 작황이 좋아 다섯 섬을 수확했다. 허리가 휘었지만 뿌듯하고 행복했던 우리 부부
ⓒ 고성신문
# 2020년 윤사월 스무나흗날
오래된 앨범을 뒤적인다. 내 살아온 나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나는 동해면 세포에서 5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동해국민학교, 거제의 해양소년단 2년, 부산 함남고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농촌 계몽운동과 내 손으로 땅을 일궈 축산으로 성공하고 싶은 일념이 있었다. 21살에 입대하여 대구 2군 사령본부 사령관실에서 행정업무를 맡았다. 군복무 중, 중매로 근동의 처자와 혼인하였다. 제대할 무렵 본부의 대장님이 제의를 해 오셨다.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인 형님이 새로운 사업을 기획 중인데 그 사무실에서 일해 볼 생각이 없냐는 것이었다. 잠시 마음이 흔들렸으나 남의 밑에서 지배를 받느니 내가 원하는 삶을 내 뜻대로 살기로 작정하고 귀향했다.
그 시절 농촌은 먹고 살 길이 막막해 가난에 허덕였다. 나는 50년대, 60년대의 배고픔을 해결하고 싶었다. 내가 성공하여 그 방법을 이웃들에게 나누고 함께 노력하면 농촌의 삶도 나아지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모범적으로 일하여 성과를 보여야 했다. 개혁과 포부를 이루기 위해 아무도 없는 산 속으로 들어가서 꿈을 펼치겠다고 말씀 드렸더니 부모님이 반대하셨다. 막내를 떼놓고 싶지 않으신 그 마음을 알겠기에 어느 정도의 성공을 이루면 돌아오겠다는 약속으로 분가를 허락받았다.
용정리 산 36번지, 삽과 괭이만으로 산밭 3천 평을 개간했다. 밤낮 없이 일했다. 보름 밤에는 교교한 달빛을 받으며 풀을 베고 곡괭이로 풀뿌리를 캤다. 그 밭에 콩과 옥수수를 심었다. 축산에 뜻이 있어 소를 키우게 되었으므로 겨울철 풀이 없을 때 콩대와 옥수수대는 소의 여물이 되어 주었다. 가축 여럿을 키우고 싶었으나 저마다 환경과 기르는 방법이 달라 소를 선택했다. 그 당시 소 한 마리는 물 좋은 논 한 마지기 값이었다. 봄부터 늦가을까지는 소를 풀어먹이는 방목이 가능했다. 그 시기에 열심히 풀을 베어 말렸다. 겨울 양식을 비축하느라 허리 펼 틈 없이 일하고 또 일했다. 자연 속에서 방목으로 자란 소는 임신이 잘 되었다. 일 년에 한 마리씩 송아지를 낳았다. 소가 늘어나는 속도로 나와 집사람의 허리는 휘었지만 재산은 늘었다. 스무 마리까지 키웠으나 더 이상은 무리였다.
아이들이 자라 학교에 다니게 되니, 외딴 산속 생활을 지속하기 힘들어졌다. 키우던 소를 몇 마리만 남기고 팔았다. 마침 그 해에 참깨를 심었는데 작황이 좋아 다섯 섬을 수확했다. 소와 참깨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매정 들판에 상토床土논 열 두마지기를 샀다. 짧은 기간에 그만큼의 논을 마련한 것이 당시로서는 대단한 성과였다. 산을 개간하면서 하도 고생을 한 탓에 자녀들을 도시로 보내고 싶어 농촌에 집을 짓지 않으려 했으나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기반 잡히면 도시로 떠날 예정에 변화가 생겨 92년, 이 집을 지었다. 이왕이면 튼튼하고 미래지향적으로 짓고자 마당에 주차장을 마련하고 창고와 마굿간은 뒷곁에 들였다.
2001년, 마을 이장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먼저 마을의 정관 초안을 잡았다. ‘관혼상제의 개선과 정관 제정, 마을 개혁 등을 추진할 것이며 일의 연속성을 위해서 후임이 중요하므로 임기가 끝난 뒤에 내가 지정하는 사람을 이장으로 지명해 줄 것을 약속해 줄 수 있겠느냐’는 확답을 받고 이장을 맡았다. 영농방송을 자주 했고 내 스스로가 행동으로 앞장섰다. 관혼상제 개선의 일환으로 부모님 제사를 합사하고, 부모님 윗대의 조상님들을 시제에 올렸다. 산으로 제물을 옮기고 이동하는 번거로움을 해결하고자 제실을 지었고 청사에서 제를 모셨다. 각처에 흩어진 묘지를 모아 추모동산을 건립하는데 앞장섰으며 기존의 관혼상제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등 혁신적 행동으로 마을 개혁에 앞장섰다. 그렇게 6년의 임기를 마치는 동안 매정마을은 고성군내에서 인정받는 모범마을이 되었다.

ⓒ 고성신문
# 2020년 윤사월 스무닷새
유월 들어 다섯 번째 추모공원 방문이다. 방문록에 기록하고 사진을 찍었다. 산솟가에 앉아 바다를 본다. 잔잔한 물결 위에 윤슬이 아름답게 반짝인다. 나는 먼 길을 걸어왔다. 돌이켜보면 까마득한 그 삶의 길 위에서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아왔던가! 이룬 것은 무엇이며 남길 것은 무엇인가?
조상님들의 평화로운 집, 추모동산을 만들어 드렸으니 흡족하다. 먼저 간 집사람 옆에 합장으로 묻힐 내 자리 있으니 편안하다. 조석을 혼자 해결하고 기억도 선명하니 다행이다. 딸 셋이 자매들끼리 우애있고 각각의 식구들과 화목하니 좋다. 큰 재산은 모으지 못했어도 집과 논 몇 마지기에 빚을 남기지 않았으니 기쁘다. 어느 날 홀연히 이 세상 떠나게 되어도 욕 먹을 일 남기지 않았으니 감사하다. 아쉬움은 모두 묻고 좋은 일만 기억하면 될 일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 이만하면 되었다. 참으로 고맙다.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0년 0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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