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① 옥처럼 귀한 샘물과 정신이 솟는 절집, 옥천사
② 호국정신이 구름처럼 일어나는 절집, 운흥사
③ 바다를 품고 화랑의 기상을 담은 절집, 문수암
④ 호국의 의로움이 곳곳에 숨어있는 절집, 장의사
⑤ 조선 건국의 꿈이 영글던 절집, 계승사
⑥ 천년고찰이 품은 호국불교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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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국선의 기상이 살아있는 무이산 문수암 전경. 의상대사는 무이산의 풍광을 보고 족히 사자를 길들일 만한 곳이며 최고의 산수수도장으로 꼽았다.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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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보살은 상서로움과 함께 지혜를 상징한다. 8천송 반야경을 들고, 지혜의 검으로 모든 번뇌를 베어버리기도 한다. 중생의 학업을 관장하는 보살이기도 하다. 그래서 상리면 문수암에는 자녀의 입시나 가족의 시험, 승진을 앞두고 기원하는 이들의 발길이 유난히 잦다. 무이산의 오르막이 꽤나 가파른데 굴곡마저 심하니 초보운전자는 마음 단단히 다잡고 출발해도 겁을 먹기 십상이다. 바짝 긴장해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땀이 흥건한 순간도 만난다. 그러나 산 중턱쯤 올라서면 그 긴장과 두려움이 한 번에 씻긴다. 무이산에서 보는 고성앞바다의 풍경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처음에는 보현암의 거대한 불상에 시선을 빼앗기다 바다로 눈이 옮겨간다. 남해의 물결은 마치 호수인 듯 잔잔하고, 점점이 뜬 섬 사이로 고깃배가 지난다. 제 아무리 뛰어난 산수화가라도 다 표현 못할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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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은 문수암의 문수전에 모셔져 있다. 문수보살 뒤로 보이는 바위틈사이로 자세히 보면 또 하나의 문수보살을 만날 수 있다.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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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대사의 현몽에서 두 걸인이 사라진 바위. 이 바위틈사이 왼쪽 벽에 문수보살상이 보인다.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문수암을 찾지만 못보는 사람들도 많다. 문수보살을 친견하려면 덕을 쌓아야 한다는 게 문수암 관계자의 말이다. 사실 기자도 몇 번이나 문수암을 다녀왔지만 아직까지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했다. 시끄러운 마음을 비우지 못한 탓이다.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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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을 비우고 봐야 만나는 바위틈 문수보살
신라 신문왕 8년인 서기 688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문수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쌍계사의 말사다. 1천300년간 건재했던 문수암은 중창이나 중건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대웅전은 1959년 부산 경남을 휩쓴 태풍 사라호에 붕괴된 후 새로 올린 가람이다. 대웅전을 들어서서 오른쪽, 해태 위에 올라앉은 문수보살 뒤로 커다란 유리창이 눈에 들어온다. 유리창은 대웅전 뒤 암벽을 가득 담고 있다. 문수보살 등뒤의 암벽은 문수암의 창건설화를 안고 있다. 의상대사가 남해 보광산, 지금의 금산으로 기도하러 가던 길이었다. 무선리 어느 동네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날이 밝으면 걸인을 따라 보광산보다 무이산을 먼저 가보라”하고는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아침이 되자 꿈속 노승의 말처럼 한 걸인이 나타났다. 의상대사는 걸인에게 밥상을 내어주며 무이산이 어디인지 물었다. 마침 걸인도 무이산으로 가는 길이라 했다. 의상대사는 걸인과 동행하기로 했다. 걸인을 따라 무이산을 오르던 의상대사의 눈앞에 고성 앞바다의 절경이 펼쳐졌다. 산에는 동서남북과 중앙에 다섯 개의 바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오대산 중대와 같았다. 순간 걸인이 손을 뻗어 중대를 가리켰다. “저곳이 내 침소다.” 걸인의 말이 끝나자 또 다른 걸인이 나타났다. 두 걸인은 손을 잡고 바위 틈사이로 사라졌다. 이상하게 여긴 의상대사가 두 걸인이 사라진 바위틈사이를 살폈다. 그러나 바위틈은 사람이 들어갈 만큼 넓지 않았다. 이리저리 살피던 의상대사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바위틈 사이 벽에서 문수보살상이 보였다. 그제서야 의상대사는 깨달았다. 꿈속의 노승은 관세음보살이었고, 바위틈으로 사라진 두 걸인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었다. 의상대사는 무이산 곳곳을 살펴보고는 “족히 사자를 길들일 만한 곳이며 이곳이야말로 산수 수도장”이라고 예찬하고 문수단을 모아서 문수암을 세우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바위 틈사이 문수보살을 만나려는 사람들이 꽤 많은 모양이다. 대웅전 뒤 두 걸인이 걸어들어갔다는 바위 앞에는 발자국이 나란히 그려져있다. 그 자리에 서서 바위틈을 살펴보면 문수보살이 보인다고 했다. 발자국 모양에 반듯하게 맞추고 아무리 올려다 봐도 문수보살은 보이지 않는다. 문수보살은 마음이 맑아야 보인다더니, 정말 마음을 비워야, 덕을 쌓아야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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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암 대웅전 앞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의 풍경은 여느 산수화보다 뛰어나다.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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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랑국선의 기상이 살아있는 무이산
무이산이 사자를 길들일만 한 명당이어서인지, 뛰어난 산세와 기운 덕분인지 무이산은 신라 화랑들의 심신과 무예를 단련하는 도장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신라의 화랑은 귀족자제들로 구성된 청년, 청소년 심신수련단체였다. 평소에는 낭도들과 함께 깊은 산과 계곡을 돌아다니며 수련하다가 나라가 어려울 때는 전장에 나갔다. 김유신과 김춘추도 화랑이었다. 화랑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영향을 끼쳤다. 화랑 관창은 열여섯 살이 되던 해인 660년, 아버지 품일의 부하로 황산벌전투에 참전했다. 당시 신라는 백제군에 비해 군수는 열 배쯤 많았지만 네 번의 전투에서 줄줄이 패했다. 신라군의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버지 품일은 관창에게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워보지 않겠느냐 물었고, 관창은 주저 없이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어린 나이와 부족한 경험은 어쩔 수 없었다. 관창은 백제군에 사로잡혔다. 백제군의 사령관은 계백이었다. 붙잡힌 관창의 투구를 벗기니 너무나 어린 소년이었다. 차마 죽일 수 없어 계백은 관창을 되돌려보냈다. 그러나 관창은 어린 나이에 비해 기개와 의지가 누구보다 강한 화랑이었다. “백제 장수를 베고 깃발을 빼앗아 오지 못해 분하다”며 관창은 다시 백제군의 진영으로 향했다. 계백은 관창의 머리를 베어 말 안장에 매달아 신라군으로 되돌려보냈다. 그런데 이 어린 화랑의 죽음은 신라군의 사기를 최고조로 이끌었다. 신라군은 백제군에 총공격을 퍼부었고 황산벌전투는 신라의 승리였다. 이 승리는 신라의 삼국통일로 이끄는 물꼬가 됐다. ‘화랑의 기상’이라고 한다. 그 기상을 고스란히 담은 곳이 바로 무이산이다. 해동명승 무이산(武夷山), 이미 이름에서부터 무(武)를 담고 있다. 삼국시대 신라의 화랑국선들은 이곳 무이산에서 심신을 연마하고 무예를 익혔다. 무이산 기슭을 내달리며 수련하는 모습은 가히 신선 같았다. 상리면 무선리(武仙里)가 여기서 나온 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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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대종사 사리탑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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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담스님의 독립운동 정신 어린 문수암
대웅전 앞, 섬처럼 자그마한 언덕 하나가 산길 계단과 이어져있다. 조붓한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면 청담대종사사리탑을 만난다. 신도들은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청담스님의 사리를 봉안해 1973년 탑을 세웠다. 진주 출신인 청담스님(1902~1971·법명 순호)은 연화산 옥천사로 출가했고, 문수암에서 수도했다. 스님은 의협심이 유달리 강했다. 1919년 진주의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해 옥고를 치렀다. 민족차별에 반발하는 요시찰 학생이었다. 1921년, 스님은 결혼했고, 진주농림학교에 입학했다. 더위가 한창이던 여름, 진주성 서장대에서 강바람을 쐬고 내려오던 길이었다. 호국사에 내려가 물 한 바가지를 들이켰다. 스님 한 분이 물었다. “시원하지요?” 답이 참으로 당연한 질문이었다. 시원하다 답했다. 스님은 다시 질문했다. “시원한 것은 물이 시원한 것이요, 학생 마음이 시원한 것이요?” 몇 차례 질문이 오고가다가 스님은 불교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리고 출가를 결심했다. 질문했던 스님은 유명한 불교학자였던 포명스님이다. 청담스님은 해인사와 백양사 등을 찾아가 출가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혼을 했으니 출가가 쉽지 않았다. 일본에 건너가 효고현 송운사로 출가했다. 그런데 당시 일본 절집에서 심부름을 시킨 것이, 불가에서는 금하는 소고기였다. 소고기를 사서 돌아오는 길, 절집에 가면서 고깃덩이를 들고 가는 것이 부끄러워 소맷단에 숨겨야 했다. 스님은 세속화된 일본의 불교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6개월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속랍 26세가 되던 해 고성 옥천사에 주석하던 박한영 스님을 은사로 출가득도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민족정기 말살에 열을 올렸다. 스님들이 수행하는 절집을 마구 휘젓기 일쑤였다. 왜색불교처럼 스님들을 강제로 결혼시키기까지 했다. 1935년, 청담스님은 만공스님으로부터 견성인가를 받고, 마치 스님의 삶과도 같은 올연(兀然·홀로 외롭고 우뚝한 모양)이라는 법호를 얻었다. 스님은 선학원에서 선부흥대회를 조직하는 것은 물론 종단기구를 구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경찰은 스님을 요시찰인물로, 끊임없이 감시했다. 청담스님이 순호스님으로 불리던 1943년 사월 초파일, 스님은 복천암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돼 상주경찰서로 연행됐다. 금강회 사건으로 불리는 독립운동 혐의였다. 그님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로 모진 문초를 받았다. 일본 경찰들은 고춧가루를 탄 물을 콧구멍에 붓고, 정강이 사이에 몽둥이를 끼워넣어 양쪽에서 밟았다. 수행정진하며 온갖 고통을 참고 견딘 스님이지만 두 달이나 이어지는 구타와 고문은 가혹했다. 이질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스님은 병자들을 수용한 피병사에 아무렇게나 방치됐다. 상주경찰서의 연락을 받고 법웅수좌스님이 도착했을 때 스님은 위독한 상황이었다. 청담스님을 돕는 측근들이 동원돼 일본 형사들에게 밥과 술을 사주고 교제비까지 주고서야 7개월 만에 겨우 석방됐다. 스님은 교단 정화와 조계종의 성립에 이르는 현대 한국불교의 정신적 토대였다. 해방 후 스님은 문수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금선대 토굴에서 4년간 용맹정진했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로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지만 꺾이는 법이 없었던 청담스님은 1971년 열반에 들었다. 스님의 사리 8과는 스님이 출가했던 옥천사와 문수암, 고창 천운사 등에 사리탑부도를 세워 봉안돼있다. 청담스님의 부도탑이 있는 곳은 데크가 놓여 전망대처럼 보현암과 남해를 내려다 볼 수 있다. 문수암은 화랑과 청담스님의 곧은 정신이 있는 곳이다. 시끄러운 마음으로 보는 이들에게 돌틈 사이 문수보살이 보이지 않는다. 문수암은 마음을 닦고 정진하는 도량이자 이 땅을 지키려는 혼이 서린 절집이다. “본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