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으로 한 세월을 바람처럼 보냈소
고성읍 대평마을 이주수(83세) 고성농요 전수교육조교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0년 0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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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제24회 대한민국 민속음악 대축제에 참가하여 흥겹게 꽹과리를 치다.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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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를 앞두고 물 댄 들판에 개구리들이 야단이다. 뭔 이바구를 저리도 씨부리는지 온 동네가 떠들썩하다. 곧 모판에 실려 온 모들은 몇 포기씩 논에 이식될 것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옛 기억을 떠올려보면, 지금이 젤로 바쁜 시기였다. 물길이 좋은 덕이네부터, 아직 무논을 만들지 못한 점분네까지 품앗이를 하려면 한 달은 온 동네 사람들이 매달려야 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무돈에 엎디려 못줄 넘길 때 허리 한 번 펴고 쉼 호흡 하려면 어디 바쁘기만 했던가. 못줄 따라 뒷걸음, 옆걸음 치려면 숨이 턱턱 막혔다. 그때 노래를 했다. “더디다~ 더디다 점심채미가 더디다~” “에헤 - 에 - 헤이” “숟가락 단반-에 세니라고 더디나~” “더디고 더디다 점심채미가 더디다” 앞소리로 모내기의 고단함을 풀어내면 엎드렸던 모꾼들이 뒷소리로 화답한다. 노랫가락으로 힘든 시간과 점심밥을 기다렸던 것이다. 올해 여든셋이 된 나는, 평생을 농부로 살아왔지만 자랑스러운 직함, 또다른 명함이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4-1호, 고성농요 전수교육조교 이주수’가 그것이다. 올해 7월에 러시아로 초청 공연을 떠나얄낀데 듣도보도 못한 바이러스 땜시 우찌될지 걱정이 한보따리다. 살아생전 외국 나가서 고성농요 부르며 우리 노래를 들려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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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서울의 태고종 총 본산 봉원사 영산대재에 초청받아 고성농요 회원들과 함께 공연을 펼쳤다.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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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우즈베키스탄에서 열린 ‘국제음악페스티벌 세계소리경연대회’에서 1등상을 받았다. 전 세계 60여 나라가 참가한 가운데 우리 팀 12명이 고성농요로 7천 달러의 상금도 받았으니 그 기쁨과 감격이 어제일처럼 생생하다. 출전할 때 마음은 지구 반바퀴를 돌아 먼 그 나라까지 가서 세계 여러나라의 소리와 겨뤄보자는 정도였다. 잘하면 5등쯤 받을라나? 맘을 턱 내려놓고 있었는데 1등상으로 호명되는 순간, 우리팀은 꿈인듯 횡재를 만난듯 애국가와 아리랑을 부르며 얼싸안았다. 내가 살아온 팔십 평생이 노래에 실려 박수소리로 남게 된 것이다. 회원들이 화음을 맞춰 화답을 잘 해 준 결과였기에 두고두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그 상금을 우즈벡의 사마르칸트 음악대학에 기증하고 돌아왔다. 그런 인연으로 올해 또 초청을 받았으니 세상의 모든 이치는 굴렁쇠처럼 굴러서 다시 만나고 돕는게다. 나는, 고성 땅에서 함안이씨 인의공파 24대 손으로 태어났다. 내 조부 함자는 재규, 부친은 진환이다. 내 조부는 이당리 ‘감티골호랑이’로 소문이 자자한 분이셨다. 일제강점기에는 술(밀주)도 치고, 솔(소나무)도 치고, 광견병 땜에 개도 치던 때였다. 순사들이 밀주를 담는지, 솔을 베는지, 개를 키우는지 살피러 동네마다 다녀도 감티골에는 들어와서 조사할 생각을 못했다. 우리 조부님이 마을 일에 끼어들지 못하게 뇌성으로 순사들을 내쫓았기 때문이었고 이당리 구장을 25년 역임하셨으니 장기 집권자셨다. 조부님은 딸 다섯에 막내로 내 아버지를 낳으셨고, 하일면 연일정씨 양반가에서 시집 온 내 어무이는 6남 4녀를 낳으셨다. 나는 10형제 중 셋째다. 내 성정은 꼿꼿하기가 대쪽같았던 조부님을 닮았고, 노래하는 내 목청과 신명은 ‘정영찬’ 외삼촌을 닮았다. 어선을 만들던 대목수 외삼촌은 목수일 틈틈이 노래를 하셨단다. 약주에 거나하게 취한 외삼촌이 배타령 나무타령 새타령을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씨는 못 속인다는 말이 있듯이, 조부와 외삼촌께 물려받은 내 끼의 내력을 외손주 김지원이가 잇고 있으니 인생은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게다. 지원이는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는 아인데 눈에 보이는 것은 죄다 뜯어보고 조립하고 만드는데 재주가 특별하다. 지원이가 어떻게 자라 무슨 일을 하게 될지 궁금증이 인다. 내가 어렸을 때 개구쟁이 짓으로 사람들을 놀래킨 것만도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뒷집 동생들과 떡갈나무에 쌍으로 매달린 까치집을 노린 적이 있었다. 바지랑대 2개를 묶고 석유에 적신 솜방망이를 매달아 까치집을 태우려다가 불똥이 초가 지붕에 떨어져 큰 불이 날 뻔 했다. 다행히 동네 청년들이 멍석을 덮어 불을 껐단다. 또 한 날은 내 어무이가 목화솜을 타서 마루에 펴놓았는데 불껄티로 살짝 건드려 화약고가 되었다. 그 때도 어무이가 이불을 덮어서 불을 끄셨다. 불은 물로 끄는 게 아니라 산소를 차단하여 불길 막는 법을 어렸을 때부터 배웠던 것이다. 큰 불로 집을 홀라당 태울 뻔 했지만 어무이는 야단치지 않으셨다. 놀란 아들이 기함이라도 하여 큰 병을 얻을까봐 걱정하신 모성애 때문이셨으리라. 내 어무이한테 배운 삶의 지혜를 이 나이가 되니 깨닫는다. 물과 불은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상극이라 서로 충돌하면 큰 상처가 남기 마련이다. 그럴 때 중간재 역할을 하는 것이 멍석과 이불이었으니 살아오는 동안 부딪히고 맺힌 일들은 맞서기보다 살짝 비껴서 처리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이다. 내 청년기 또한 호기심 천국이었다. 나무하러 나서던 길, 동네 청년들과 지게를 새끼줄로 상여처럼 엮어 산에 올라 상여 앞소리를 흉내냈다. 북망산천길의 슬픔을 노래로 풀어낸 가락이 심금을 울렸고 누군가의 죽음을 소리로 애도해 드리고 싶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전쟁이 났고 농촌은 허기졌고 지독히도 가난했다. 상급학교 진학을 꿈꾸기는커녕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던 시절이었다. 소를 몰아 논밭을 갈고 지게에 땔감을 짐으로 나르고 낫질과 삽질을 하며 식구들의 양식을 마련하던 때였다. 그래도 내 속에 가득차서 가오리연처럼 하늘로 날아오르던 신명과 끼는 버리지 못했다. 개천예술제가 열리면 만원버스에 매달려 진주로 달려갔다. 넘치는 관중에 밀려 입장을 허락받지 못하면 시연팀에 몰래 합류하기도 했다. 꾼들이 춤추고 노래하고 신명나게 노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따라하며 언젠가는 저렇게 하겠다는 꿈을 꾸었다. 내 나이 스물 살 때였다. 64년, 내 나이 스물다섯에 고성농촌지도소에서 주최한 ‘등지소리 경연대회’에 구경을 갔다. 신명난 가락을 듣고 수건을 얻어왔다. 쳐다만 봐도 신이 나서 어깨춤이 절로 춰지고 온 몸에 신열이 일었다. 틈틈이 꽹과리를 치고 북을 두드렸다. 명절이면 동네 메구(농악) 패에서 어울리고 동네 잔치가 나면 사물을 두드리며 신명을 풀었다. 77년, 고성농요 전수회를 창립했다. 김석명 선생이 방학동안 틈틈이 고성지역 사랑방을 다니며, 7년 동안 농요 보유자들의 소리를 채집하여 모임을 만들 때 나도 회원으로 선발되었다. 인근 동네까지 합해 49명의 회원을 모집했다. 그 때 최규칠 어르신이 계셨는데 기억력이 신묘하고 총기가 별빛이셨다. 모든 종류의 농요를 100% 기억하실 정도의 특별한 분이셨다. 그 분께 사사받으며 농요의 진짜배기 맛을 알아갔다. 그 해, 제28회 개천예술제에 처녀 출전하여 최우수상을 받았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수상이었다. 돌아오니 군청 뒷마당에 거하게 잔칫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메구치고 노래하며 수상의 기쁨을 나눴다. 참으로 신명나고 즐겁고 재미난 시절이었다. 꿈속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농부로 살아가는 세월의 길목마다 메구를 쳤다. 다음 해 봄에도 밀양에서 열린 경남민속예술경연대회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니 회원들이 얼마나 신명나게 춤을 췄으랴. 85년 12월 1일에 고성농요가 ‘국가중요무형문화재 84-가호’로 지정이 되었다. 스승이던 이상수 님과 유영례 님이 인간문화재가 되셨다. 드디어 우리가 노래하고 춤추던 일이 결실을 맺어 인정을 받은 것이다. 나는, 많은 일을 하며 세월을 보냈다. 천성이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는데다 세상의 많은 이치들이 눈에 보였다. 외우산마을 이장을 13년 봉직하면서 농업의 기계화에 앞장섰고 소출이 많은 통일벼 단지를 우산리 전체에 만들기도 했다. 관정을 파서 해갈을, 마을의 도로 포장도 앞섰다. 농협의 영농부를 활용하여 트랙터와 콤바인 경운기 두레를 만들어 공동작업을 시도했다. 기술의 발전을 농업에 접목시켜, 노동력을 절감하는 농법을 찾아다녔다. 또한 시청료 징수원으로 7년 동안 일하면서 고성군 구석구석을 알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에게서 고성의 역사와 숨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조부님은 25년간, 부친과 나도 이장을 맡아 우리 집안 3대가 이장을 이었다. 특별히 내세울 건 아닐지라도 나는 두 분 어른의 강직함과 꿋꿋함과 동네를 위해 무엇인가 일 하시려던 그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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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토록 내 수발에 허리가 휜 제춘이 할멈과 정원에 다정하게 앉았다.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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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혼인하여 아들과 딸 둘을 낳아주고 평생 수발하느라 애쓴 내 각시 ‘제춘이(74세)’는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다. 손끝이 맵고 입(말) 없는 사람이라 내가 하는 일에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 한 적이 없었다. 부모님께는 효성 깊은 며느리였고 자식들에게는 현명한 어미였으며 나에게는 최고의 아내였다. 언제나 나를 믿고 묵묵히 뒤따라 와 준 사람, 다시 태어나도 나는 내 각시를 만나서 알콩달콩 살고 싶다. 돌아오는 생일에는 맛있는 것을 차려놓고 오직 각시만을 위해 노래 한 곡을 불러야겠다.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부를까. 동백아가씨를 부를까? 2007년, 2년 동안 여섯번의 시험을 통과하여 ‘중요무형문화재 전수 교육 조교’가 되었다. 조교는 고성농요를 가르치고 중요한 행사에 참석하여 앞소리를 하는 사람이다. 나는 고성농요의 음을 제대로 내며 FM으로 부르려 한다. 본판을 잃지 않고, 본질을 제대로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전국에 40여 개의 농요가 있는데 제1호가 고성농요다. 2호 예천농요와 3호 진도 들소리보다 앞서 찾은 우리의 소리가 고성 농요다. 바람이 있다면 멋진 후계자를 키우는 일이다. 내 소리의 원음을 그대로 이어가며 잘 불러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긴 세월을 노래로 다져줄 진정한 후계자가 나타났으면 좋겠다. 노래는 인간의 원초적인 표현이다.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 노랫말과 리듬으로 시간의 물레를 자아 세월을 엮어왔다. 내 삶도 그렇다. 이 나이 되도록 노래하고 춤 추고 메구치며 살아왔다. 내 삶을 채워준 노래, 내 인생을 살 찌워준 가락, 내 가족을 지켜준 신명으로 웃으며 즐거이 살아왔다. 남은 생도 노래하고 춤 출 것이다. 고성 들판의 모내기부터 추수로 바쁠 가을걷이와 볏짚을 모두 걷어낸 뒤 남을 빈 들판 허수아비의 시간까지 모두 노래와 춤으로 채울 것이다. 노래는 내 삶이고 내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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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0년 0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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