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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들불처럼 일었던 대한독립만세를 기억하라

희생자 없었던 만세시위, 배둔장터독립만세운동
고성군 최초로 시도된 고성시장독립만세운동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 맞아 항일정신 재조명

최민화 기자 / 입력 : 2019년 02월 28일
ⓒ 고성신문
1919년 1월 도쿄. 빼앗긴 한반도에는 끝날 것 같지 않은 겨울이 이어지고 있었다. 1월 6일,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현 재일본한국YMCA회관)에 조선인 유학
200여 명이 모였다. 그들은 “지금이 독립운동에 가장 적당한 시기이고 구체적 운동을 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그 길로 11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고, 그들은 다음날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당시의 조선인이라면 누구든 그랬겠지만 제국주의의 심장부에서 공부하는 조선청년독립단은 조국의 독립을 더더욱 간절히 바랐다. 조선의 청년들은 독립선언을 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훗날 변절하기는 했지만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고 그때만 해도 누구보다 항일에 앞장섰던 춘원 이광수가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2월 7일, 실행위원들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거사일이었던 2월 8일 아침. 조선청년독립단은 독립선언서 결의문 민족대회 소집청원서를 각국의 대사, 조선총독부와 일본의 국회의원, 신문사, 잡지사 등지로 보냈다. 그리고 오후 2시, 뜻을 모았던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는 600명의 조선 유학생이 모여들었다. 회장 백남규가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총회 개최를 선언하고 최팔용은 결의대로 긴급동의를 발의,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변경했다.백관수가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만국 앞에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며 2.8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뒤이어 대회장에는 천둥보다 큰 박수와 함께 “조선독립만세” 함성이 울려퍼졌다. 한반도의 3월을 대한독립만세 외침과 태극기로 물들인 3.1독립운동의 도화선 끝에 불꽃이 붙었다.

# 고성 최초로 시도된 고성시장 만세운동
1919년 3월 15일 밤. 곤명면 곤양 출신 이주현이 철성의숙을 은밀히 찾았다. 의열단원인 이주현은 일본인 고관 암살사건에 가담한 인물이었다. 그는 박거수와 박진완에게 고성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전했다. 고성 최초 만세운동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박거수와 박진완은 배만두와 이상은, 김상욱 등 동지들을 모으고 계획을 세웠다. 거사일은 3월 17일이었다. 박거수의 집과 민족교육기관 철성의숙은 고성읍 만세시위의 본부격이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태극기를 찍어냈다.거사 계획은 모두 3차였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1차는 배만두, 기독교인이 중심인 2차는 이상은, 농민을 중심으로 한 3차는 김상욱이 책임지고 이끌기로 했다. 마산가도, 통영가도, 진주가도, 대가가도 네 길에서 동시에 만세운동을 시작해 철성시장(현 고성시장)에 모이기로 했다. 모두 모이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만세를 부르며 읍내를 행진할 계획이었다.거사 당일 새벽. 배만두의 집으로 일본헌병들이 들이닥쳤다. 수색하던 헌병들은 배만두를 끌고 갔다. 대가가도에서 일으키기로 했던 독립만세운동 계획이 누설돼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고성 최초의 독립만세운동 시도가 수포로 돌아갔다.

# 고성사람의 자각과 용기 일으킨 만세운동
배만두가 일본헌병에 붙들려 선장을 잃은 배 형세였다. 그러나 고성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청년들이 나섰다.도쿄의 세이소쿠영어학교(정칙영어학교·현 세이소쿠가이엔 고등학교)에 유학하며 2.8독립선언에 참여했던 청년 안태원(철성면 성내동 출신)은 고향 고성으로 돌아왔다. 부산상고 학생인 서주조 등 동지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고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독립만세운동 동참을 권했다.“지금 각지에서는 일개 농부까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펼치는데 고성은 무엇 때문에 이를 결행하지 않는가? 지금이야말로 수수방관할 때가 아니다.”첫 번째 만세시위가 실패로 돌아간 후 닷새가 지났다. 객사와 고성시장 싸전 근처에 고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 200명이 모였다. 그 중심에 안태원과 서주조가 섰다.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고성시장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고성장에 모였던 사람들도 한둘씩 만세대열에 합류했다.일본 헌병과 경찰은 총칼로 시위대를 위협했다. 주동자들을 색출하고 검거했다. 시위대열은 흩어져 버렸다. 비록 금세 해산됐지만 이날의 만세운동은 우리는 황국신민이 아니라 조선인이고, 이 땅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조선땅이라는 자각과 용기를 불러온 단초가 됐다.

# 조선인의 기개 증명한 배둔장터 만세운동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했다. 일제강점기인 탓에 원래 5개월에 달했던 국장은 겨우 한 달을 조금 넘는 기간, 일본식으로 치러졌다. 일제의 독살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고종의 인산일은 3월 3일이었다. 만세운동날과 인산을 같은 날 할 수 없었다. 3월 1일 정오, 종로 한가운데 탑골공원에 정오를 알리는 포 소리가 울렸다. 오포를 신호탄 삼아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서대문까지 행진했던 학생들이 다시 종로로 돌아왔다. 탑골공원에서는 독립선언서가 낭독됐고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현장에는 최낙종, 최정원이 있었다.인산에 참여하고자 상경한 길에 3.1만세운동을 목도한 최낙종과 최정원은 고성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고자 했다. 구만면으로 돌아온 최낙종은 허재기, 최정주, 최낙희, 이종흥 등 동지들과 긴하게 의논하기 시작했다.3월 20일, 배둔장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구만면에서 나팔소리가 들리면 국천변 사장에 모이기로 했다. 지금이야 흔적도 없지만 그때만 해도 국천사장은 씨름경기를 할 정도로 넓었다. 구만면사무소 바로 옆 최낙종의 집 사랑채에서 만세운동 작전이 시작됐다. 최낙종이 변상태를 통해 입수한 독립선언서를 한문학자이자 구만면서기였던 이종흥이 독립선언서를 요약하고 격문과 함께 필사했다. 필사본은 구만면내 12개마을과 인근 마암면, 개천면, 영오면, 회화면에도 전달됐다.거사일 오후 1시. 최석호가 구만면 화림리 당산에서 국천을 향해 나팔을 불었다. 국천사장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최정원이 독립선언서, 허재기는 공약삼장을 읽어내렸다. 군중 앞에 선 최낙종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대열은 배둔장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시위대가 배둔장으로 향한다는 소식에 일본헌병과 경찰은 길목을 막고 기다리고 있었다. 총칼을 아무렇게나 들이대고 멈추라며 위협했다. 그러나 핍박받던 조선인들의 기개를 꺾을 수는 없었다.군중들은 외려 일본헌병을 에워싼 채로 성토하고, 헌병을 태운 말의 귀에다 나팔을 불어댔다. 국상 중이라 평양립을 쓰고 있던 최정주는 당황한 일본헌병을 조롱했다. 일본의 저지선이 무너졌다. 군중들은 잠시 멈춘 행진을 다시 시작했다. 천천히 그러나 당당하게 10리를 걸어 배둔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전날밤 미리 연락해뒀던 서찬실, 김갑록, 김동기가 이끄는 시위대와 합류했다.일본헌병이 또 한 번 출동했다. 주동자를 색출해 검거하려는 헌병에 대항하던 최정주는 헌병의 손가락을 꺾어버리고 동지들을 구출했다. 이것이 100년 전, 고성군에서 처음 단 한 명도 다치거나 붙잡히지도 않은 만세운동인 배둔장터독립만세운동이다.

# 100년 전의 독립만세운동 다시 보기
한반도에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태극기와 함께 일렁이던 100년 전. 한반도를 넘어 일본과 중국, 미국 등 몸이 있는 장소를 불문하고 정신은 하나로 불탔다. 일제로부터 조국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으로 들끓었다. 고성도 마찬가지였다.해마다 3월 19일이면 배둔시장은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들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배둔장터를 행진한다. 올해는 국천변에서 시작해 배둔시장까지, 100년 전의 독립만세 행렬을 따라간다.1920년대 경남지역 독립운동 본거지였던 옥천사에서는 특별한 기해년 달력을 제작했다. 영오면 출신 백초월 스님의 진관사 태극기를 시작으로 신화수 스님과 한봉진 스님 등 독립자금을 모으는 것은 물론 항일운동에도 앞장섰던 항일지사들의 모습을 담았다. 옥천사와 인연이 있는 1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은 달력을 통해 불자들에게 100년 전의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전하고 있다.얼마 전 열린군수실에는 1914년부터 1924년까지 민족교육기관으로 혼불망 사상을 퍼뜨린 송계의숙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송계의숙(송광의숙)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 역사복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단 10년간 존재했을 뿐이지만 민족의식은 어느 곳보다 높았던 교육기관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는 군민의 뜻이다.정부는 3.1절 100주년을 맞아 부산경남 지역 독립유공자 19명에게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을 수여한다. 이 중에는 최낙종 선생과 함께 배둔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최낙희 선생도 포함돼있다. 다른 항일운동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으나 그 공만큼은 뒤지지 않는 최 선생의 공적이 뒤늦게나마 주목받고 있다.최근에는 영화 말모이의 흥행으로 경성 건축왕이자 조선어학회의 중심인물이었던 정세권 선생을 재조명하는 시선도 나오고 있다.1919년 이 땅에 들불처럼 횃불처럼 일었던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이 100년이 지난 지금, 재연된다.
최민화 기자 / 입력 : 2019년 0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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