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100대 국정과제 중에는 유기동물 입양 활성화가 포함돼있다. 실제로 대통령은 유기견 출신인 토리를 입양해 함께 생활하고 있다. 토리는 대통령의 성을 따 문토리로 불리며 대통령의 SNS에 종종 등장해 시선을 끌고 사랑받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시절 동물권보호단체 케어에서 각 후보에 제안한 유기견 입양 캠페인을 통해 토리를 만났다. 이후 청와대 입성과 함께 토리를 정식 입양했다. 덕분에 유기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 반려동물, 사지 말고 입양하세요
유기동물의 수는 해마다 8만 마리가 넘는다. 지난해에는 10만 마리가 넘는 동물들이 유기됐다. 유기동물의 수는 인구에 비례한다. 동물권단체 케어에서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유기동물 통계를 분석한 결과 휴가철이 포함된 6~8월 사이 유기동물 수는 30% 정도였다.
경남도내 유기동물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2013년 5천105마리였던 유기동물은 2014년 5천223마리, 2015년 5천609마리, 2016년에는 6천596마리였다. 지난해에는 7천941마리였으며 올해는 8월 기준 7천553마리로 끊임없이 증가 중이다.지난해 서울시가 반려동물 취득경로 통계조사를 진행한 적이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기 시작한 사람 중 유기동물을 입양한 경우는 3.8%에 그쳤다. 정부가 2015년 성인남녀 3천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동물보호에 관한 국민의식조사’에서 응답자 93.2%가 유기동물의 입양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답한 것과는 사뭇 다른 결과다.
국내에서 반려동물 등록제를 가장 먼저 실시한 지역은 경기도 성남시였다. 2008년 시범 시작된 성남시의 반려동물 등록제는 반려동물에게 내장형 칩을 피하에 삽입하거나 목걸이 형태의 인식표를 달아 동물과 주인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시행 첫해 2만6천 마리가 넘었던 유기동물은 10여년 만에 5천 마리 이상 줄었고, 유기동물의 입양율은 18%에서 34.5%로 증가했다.
경기도에서는 2013년 도우미견나눔센터를 설립했다. 이 센터에서는 유기견을 청각장애인보조견, 지체장애인 보조견, 동물매개치료견으로 훈련시켜 필요한 가정에 무상으로 분양하고 있다. 5년 간 400마리 가량이 도우미견으로 분양됐다.2017년 기준 유기동물 입양률이 가장 높았던 곳은 세종시로, 발생한 유기동물의 35% 이상이 새로운 가족을 만났다. 이어 충북, 경기, 강원도가 뒤를 이었다.세종시는 1인가구 비율이 전국평균보다 높고, 40대 이하 인구의 비율이 68.3%로 전국 1위다. 그러나 동물판매업체는 적은 편인데다 최근 젊은 층을 중심으로 ‘사지 말고 입양하자’는 움직임이 인 덕분에 유기동물보호소를 찾는 발길이 늘어난 것으로 분석했다.
# 임시보호로 인연 맺은 다로 영감님
버려진 동물을 거둬 키운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2009년 11월 26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살던 시절이다. 우리집 개대장 희동이가 혼자 노는 게 안타까워 동생을 들이려다가 우연히 보게 된 사진 한 장. 2㎏도 안 되는 요크셔테리어는 핵경화증인지 백내장인지 모르겠지만 안구가 심하게 탁했고, 이가 하나도 없어서 미처 가두지 못한 혀가 오른쪽으로 빠져있었다. 배변훈련이 전혀 돼있지 않았고 고질적인 피부병까지 있었다.
관리 잘 된 10살 개와 관리 안 된 10살 개는 엄청난 차이다. 안락사 직전 구조되는 천운을 얻었지만 예쁜 외모와 작은 체구 덕분에 입양갔다가 두 번을 파양당한 10살짜리 파파 할아버지 강아지였다.
당시 보호소에서 개별관리가 쉽지 않은 아이들에 한해 두 달간 일반가정에서 집밥을 먹게 해주자는 의도로 임시보호 릴레이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다. 냉큼 그 파파 할아버지 강아지를 데려왔다. 프로젝트의 1호 임보 성공견이었다. 그리고 전체 보호소를 탈탈 털어 최고령 강아지였다.
원래 이름은 ‘토로’였지만 불만을 토로하다, 같은 부정적 의미가 떠올라 ‘다로’로 이름을 바꿔줬다. 그리고 그날로 입양을 결정했다.
이름 뒤에 늘 ‘영감님’이 붙었던 다로는 내 껌딱지였다. 배변훈련이 안 돼있다더니 우리집에 와서는 화장실 근처까지 잘 찾아갔다. 물론 가다가 너무 급해 실수할 때도 많았지만 늘 노력하는 아이였다. 이는 하나도 없지만 오로지 건사료만 먹는, 자존심 강한 아이이기도 했다. 볕이 잘 드는 자리에 방석을 깔아주면 하루종일도 잠을 잘 수 있는 아이였다.
나이가 더 들면서는 잠도 더 많아졌다. 산책길에 방파제를 걷다가 바다에 빠지는 사고도 겪었다. 혼자 살 적이라 혹시나 내가 없을 때 잘못되진 않을까 무서워서 6개월 간 고성 본가에 내려보내놓기도 했다. 내가 못견디고 다시 데려왔지만.
복층 오피스텔에 살면서는 2층에 침대를 뒀는데 다리가 아팠던 다로는 계단을 오르지 못해 늘 계단 밑에서 통곡을 했다. 아침저녁 안고 오르내려야 했다.
사람아기보다 더 많이 신경쓰며 함께 살았다. 날짜를 꼽아보니 1천777일. 다로는 겨우 그만큼만 나와 살다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노환이었다.
한 달을 입원해있던 다로는 마지막 날 아침, 밥도 잘 먹었다고 했다. 바쁜 날이라 점심 때 면회가야겠다 하고 급히 점심을 한 술 뜨는데 동물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지금 빨리 오라고.
신고 있던 슬리퍼 그대로 신을 갈아신을 틈도 없이 여의도에서 신촌까지 택시를 탔다. 다로는 차가운 진료대에 누워서 겨우 숨을 쉬고 있었다. 살이 빠질대로 빠져 마지막엔 1.2㎏밖에 안 되던 그 작은 몸에 연결된 줄은 왜 그리 많은지.
그 관들을 전부 떼고 안고 있겠다 했다. 병원에서 진료실 하나를 통째로 내주며 인사를 나누라며 배려했다. 사실은 다로가 내가 가는 10분동안 심장이 한 번 멈췄다고 했다. 이미 약해질대로 약해진 다로에게 더 이상의 인공적 처치는 원치 않는다는 데 서명하긴 했으나 의료진은 혹시나 해서 심폐소생술을 했고, 다로의 작은 심장은 약하게 다시 뛰기 시작했다고 한다.
엄마를 보고 가고 싶어서 다로가 마지막 힘을 냈나 봐요, 하는데 눈물이 쏙 들어갔다. 눈물범벅인 얼굴로 다로를 보내면 안 되겠다 싶어서.
산소공급기를 뗀 다로는 숨쉬기 힘겨워했다. 숨을 몰아쉬는 다로를 안고 다로가 얼마나 예쁜 아이였는지, 다로를 만나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이야기해줬다. 혼낸 건 다로가 미워서가 아니라고도 얘기했고, 다로를 너무너무 사랑한다고도 이야기했다.
마지막 말을 끝내고 3초쯤 지났을까. 모니터에 표시되던 다로의 심박이 직선을 그렸고, 다로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 10살에도 1살 같던 초동안 보슬 어린이
다로를 입양한 후 2년쯤 지났을 때 전의 그 보호소에서 연락이 왔다. 10살쯤 되는 아이가 입소했는데 희동다로엄마가 임시보호해줄 수 있겠냐고.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알았다 하고 날짜를 조절해 데려온 아이는 봄날 아침 파릇파릇한 새싹 위에 내리는 보슬비 같은 아이였다. 이름도 보슬이였다.
별명이 ‘어린이’였던 보슬이는 10살로 추정되는 나이와는 달리 1살된 아기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동안이었다. 모량도 나이답지 않게 충분히 많아서 미용실에 다녀오는 날이면 정말 ‘깜빡 넘어갈’ 정도로 예뻤다.
보슬이는 착해도 너무 착했다. 동갑인 희동이가 놀자고 펄쩍거리고 뛰면서 살짝 깨물면 화를 낼 법도 한데, 히잉~하고는 자리를 피해 버렸다. 나중에는 그나마 아릉~하며 노기를 비치기는 했지만.
보슬이는 기관지의 일부가 좁아 기침이 잦은 증상의 기관협착증이 있었다. 게다가 나이가 들었으니 슬개골 탈구가 이미 진행된 상태여서 수술이 불가능했고, 시간이 지나면서는 심장도 나빠졌다. 고성에서는 개의 심장초음파를 볼 수가 없어 진주로, 거제로 떠돌아 다니다가 희동이와 함께 거제까지나 다니곤 했다.
기관지협착에 심부전까지 있으니 기침하느라 등을 곧추세우고 잠을 못잘 때도 부지기수였다.
심장혈관으로 혈액이 제때 전달되지 않으니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간혹 발작을 하기도 했다. 혀가 새파래지면서 뻣뻣해지는 걸 처음 보고는 울며불며 병원부터 찾았다. 하지만 기절한 보슬이를 눕혀놓고 대퇴부부터 심장까지 가볍게 마사지하며 혈액이 돌게 하고, 산소캔으로 서서히 산소를 공급해 뇌손상을 방지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한동안 괜찮아지나 싶다가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발작의 간격이 줄었고, 발작지속시간은 오히려 늘었다. 지난해 6월 2일 새벽부터 이어지던 발작에 아침 일찍 병원에 갔다. 그러나 보슬이는 그날을 넘기지 못했다.
# 아프고 슬픈 유기견을 내 가족으로
다로와 보슬이는 둘 다 이미 내게 올 때부터 이미 나이가 많았고, 여기저기 아팠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게 버려질 이유가 될 것 같지는 않은데 사람 마음은 다른 모양이었다.
둘 다 어딜 가든 예쁘단 소리를 듣는 아이들이었다. 예쁜 겉모습에 반해 아기 때 입양해 키우다 나이가 들면서 아프고 관리하기도 힘들고, 돈도 적잖이 들어가니 버림 받은 건 아닐까.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모든 유기견 출신이 그렇진 않겠지만 내 두 아이들은 식탐이 많았다. 길에서의 생활 때문에 먹을 게 있을 때 먹어둬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고, 사랑 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늘 허기졌는지도 모르겠다.
다로는 살은 찌지 않으면서 늘 배가 빵빵하도록 밥을 먹었다. 항상 뭔가 짭짭대고 있었다. 귀도 잘 안 들리면서 간식봉지 여는 소리는 기가 막히게 잘 들었다. 토할 때까지 먹기도 일쑤였다.
보슬이도 마찬가지였다. 식탐은 상상초월이었다. 게다가 간식을 희동이에게 뺏길까 봐 조용히 이불 위에 내려놓고는 머리로 흙을 덮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눈에 훤히 보이는데 보슬이 딴에는 다 숨겼다고 안심하고 자리를 뜨면 온가족은 보슬이가 숨긴 간식이 다 보여도 안 보이는 척 “보슬이 까까 어디 갔어?”라며 열연해야 했다. 혼자 진지한 얼굴로 다 보이게 간식을 숨기는 게 한도 없이 귀여운 행동이었지만 동시에 너무도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다로와 보슬이가 나이 들어가면서 아프면 답답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기 때부터 함께 지낸 희동이는 모든 병원기록이 남아있고 어디가 아팠고 왜인지 내가 기억했다. 그러나 다로와 보슬이는 입양 이전 진료기록이 없으니 진료에 애를 먹기도 했다.
다로와 보슬이는 언제부터 어떻게 아팠는지 알 수 없고, 나쁜 습관이 언제부터였는지, 나쁜 습관을 보일 때면 어떻게 대처했는지 알 수 없으니 내 방식으로 다시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익숙해지는 건 우리 가족들도 그리고 내 강아지들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처럼 어디가 불편하고, 어떻게 해주면 좋겠는지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