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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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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내 아이’, ‘가족’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기자가 소문난 ‘개어멈’이기도 하지만, 이번 동물복지 관련 기획취재의 구상 단계에서 이 아이들이 준 억과 경험이 가장 큰 이유였기 때문이다.
# 개대장 희동이와 ‘반려’를 시작하다
7월 마지막 날. 아침까지만 해도 말짱히 산책까지 다녀왔다. 평소답지 않게 날다시피 산책하는 모습이, 이제 좀 나아지려나, 기대하게 했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머리를 빗으려 거울을 마주했는데 벌떡 일어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돌아보는 순간, 비틀거리다 넘어졌다. 단 두 번의,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대로 눈의 총기가 사라졌다.품에 안고 허벅지부터 심장까지 마사지했다. 하지만 서서히 심박이 느려졌고, 이내 숨이 잦아들었다. 14년을 함께 살아온 내 강아지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2004년 12월 9일, 태어난 지 3개월 차에 나의 강아지가 된 희동이는 일명 강아지공장 출신이었다. 번식농장에 살았던 아기 희동이는 아파도 약을 제대로 먹지 못했고, 밥을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했다. 귀에는 곰팡이가 있었고, 배는 온통 각질과 여드름투성이였다. 변을 보면 심하게 혼이 났던지 처음 만나고 얼마간은 식분증, 그러니까 변을 보고는 그대로 먹어버리는 일종의 강박증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농장에서 맞았던지, 늘 성인남자를 두려워했다.
처음 희동이를 만났을 때만 해도 기자의 ‘반려견’에 대한 지식은 무지에 가까웠다. 희동이를 데려와 함께 지내면서 공부가 시작됐다. 희동이의 행동을 나름대로 분석해 그에 맞게 반응해줬다. 같은 값이면 더 좋은 사료를 먹이고 싶어 사료봉투 뒷면의 성분분석표를 샅샅이 살펴본 후 택했다.
2011년 초. 희동이가 노견에 속하기 시작했다. 기력이 없는지 계속 까무룩까무룩 가라앉는 아이를 통영을 거쳐 부산까지 데려가서야 겨우 병명을 알았다. 흔히 ‘애디슨병’이라 불리는, 부신피질호르몬저하증이라고 했다.식욕이 사라지고, 피모가 푸석거리고, 예민해졌다. 호르몬이 나오질 않으니 호르몬제와 스테로이드제를 병용해야 했다. 항상 3.4㎏을 유지했던 아이는 수치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 2.7㎏까지 살이 빠졌다. 골격이 제법 큰 말티즈였으니 그 정도 체중이면 피골이 상접한 수준이었다. 저혈당 쇼크로 혈관이 잡히질 않아 검사조차도 고역이었다. 팔에서 잡히지 않으면 허벅지혈관을 찾아야 했고, 그래도 혈관이 안 보이면 목에서 채혈해야 했다. 서너 번 만에 채혈에 성공하면 수액처치를 위해 혈관에 그대로 주사바늘을 꽂아둬야 하기도 했다. 입원과 퇴원을 수차례 반복했다.
이후 3년 정도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수의사의 말을 1년에 한 번씩은 들어야 했다. 간세포가 자꾸만 파괴되고, 적혈구가 깨지는데 원인을 알 수가 없어 2주씩 입원하기도 했다. 24시간 문이 열려있고, 중환자실이 있는 병원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 언제든 희동이가 아프면 달려가야 안심이 됐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고 3때 책 한 번 본 적 없던 내가, 강아지를 위해서 식단과 약품을 공부했다. 경구투약보다 주사제가 더 안정적이겠다는 결론을 얻었고, 수의사와 상의 끝에 25일 주기의 주사제를 택했다.
수치가 정상치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완치는 안 되는 병이라 평생을 그렇게 관리해야 했지만, 그나마도 다행스러웠다. 희동이가 뛰어노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했다. 희동이는 개대장이었고, 의연하고 당당하게 대장 노릇을 해냈다.
# 다로 보슬이와의 인연, 가족의 재탄생
희동이처럼, 마음의 상처가 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주 우연히, 안락사 위기에서 구조됐다는 아이들의 사진을 보게 됐다. 그 중 유독 한 아이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10살이었고, 눈이 잘 보이지 않았고, 이가 거의 없었고, 다리가 많이 아픈 아이였다. 네 발 중 하나는 발가락이 없이, 주먹 쥔 것 같은 모양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보호소에서 2년을 보내며 이미 두 번의 파양 경험이 있는 아이라고 했다. 임시보호라고 해서, 두 달 정도를 돌보기로 하고 데려왔다. 희동이가 반겼고, 나이 든 그 아이 역시 강아지가 가장 마음 편할 때 보여주는 누운 자세로 잠들었다. 그대로 임시보호가 아닌, 입양이 결정됐다. ‘다로’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요크셔테리어 할아버지였던 다로는 척추를 따라 긴 상처가 있었다. 검진삼아 병원에 간 김에 물어보니 뭔가에 찢어진 것 같은데 거리생활을 했다면 아마도 누군가 돌멩이 따위를 던진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겨우 1.8㎏, 웅크리면 성인남자주먹 하나만 한 아이인데 말이다. 사람만큼 잔인한 존재가 없는 것 같았다. 희동이도, 다로도 사람에게서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고 내 강아지가 됐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내가, 우리 가족이 제 세상의 전부였다. 온몸으로 신뢰를 표했다.
다로가 살았던 유기견보호소는 지자체의 보호소 다시 말해 관리예산에 맞춰 안락사로 개체수를 조절하는 보호소나 재정적 부담 때문에 동물들의 관리보다는 단순 수용에 그치는 열악한 환경의 사설보호소, 애니멀 호더(동물을 돌보기보다 수에만 집착해 보호 및 관리 능력을 벗어날 정도로 개체수를 늘리는 사람을 일컫는 말)나 학대가해자로부터 동물들을 구조해 보호하는 곳이었다. 재입양을 목적으로 하지만 다로처럼 나이가 많거나 병이 있는 동물들의 재입양은 사실 쉽지 않았다.
다로를 데려온 후 2년쯤 지났을 때 보호소에서 연락이 왔다. 임시보호할 곳을 찾는 아이가 있는데 혹시 희동이 다로 엄마가 보호해줄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다.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데려오겠다고 약속하고 한 달쯤 지나, 10살 노견이지만 생긴 건 3살쯤 돼보이던 말티즈 보슬이를 만났다.
보슬이는 아래위 앞니를 몽땅 발치하고 왔다. 관리가 제대로 안 돼 이가 상할 대로 상했던가 보다, 싶었다. 그런데 보슬이와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보슬이 역시 성인남자를 무서워하고, 여자든 남자든 갑자기 손을 올리면 극도의 경계심을 보였다. 이 아이 역시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았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번식농장에서 학대받았던 기억을 안고 우리 가족과 인연을 맺은 희동이, 길거리를 떠돌며 모진 생명을 이어오다 뒤늦게 만난 다로와 보슬이까지, 세 강아지는 모두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았지만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고부터는 세상 어느 강아지보다 사랑스럽고 예쁘고 밝게 지냈다.
# 반려동물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
가장 오랜 시간 곁을 내줬던 희동이는 부신피질호르몬저하증과 간암, 흑색종이 겹치면서 2018년 7월 31일 무지개다리를 건너 혼자 소풍을 떠났다.(동물의 반려인들은 죽음을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소풍을 떠났다는 식의 표현에 익숙하다.)
국내에서는 동물의 특히 노령동물의 암 치료가 가능한 병원은 흔치 않다. 항암과 방사선 치료까지 가능한 곳은 국내에 두 군데 뿐이다. 그나마도 서울과 청주에 있어 늙고 아픈 희동이가 버텨줄지 걱정하던 중 희동이가 가버렸다.
이름 뒤에 늘 영감님이 붙었던 다로는 16살까지 나름 장수했지만 신장과 췌장이 망가지면서 사람으로 치자면 노환으로 한 달이나 입원했다가 2014년 10월 7일 점심 때쯤 소풍을 떠났다. 너무도 어려 보여 어린이로 불리던 보슬이는 2017년 6월 2일 새벽에 알 수 없는 뇌신경 문제로 쓰러진 후 몇 시간 되지 않아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내 아이들은 나를 만나서, 우리 가족으로 살아서 행복했을까. 그랬다고 믿고 싶다. 말도 못하고, 다리도 네 개가 달려있고, 꼬리도 있던 아이들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눈빛으로 다 통했다. 적어도 나는 내 아이들이 내게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내 아이들 역시 내 눈만 보고도 행동이 달라졌다. 가족이니까.
유난스러운 반려인이었을 수 있겠지만 견종의 특성, 관리방법, 유전적 결함이나 생기기 쉬운 질환, 앓고 있는 질환에 따른 식단 공부까지, 내 강아지들을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밤에 갑자기 강아지들이 아프면 달려갈 병원이 없어 밤새 간호하며 뜬눈으로 지새우기도 했다. 아이들이 나이가 들면서 사람처럼 관절질환은 물론 심장질환이 생기고, 췌장이나 신장이 상하기도 했다. 그러면 식단이 달라져야 하니 영양성분을 공부하고, 적절한 양으로 밥을 직접 만들어 먹이기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은 최선을 다해, 양질의 식사와 환경, 의료혜택을 주고 싶었다. 사람 가족과 똑같이, 어떨 때는 더 나은 대우를 하기도 했다. 역시, 가족이니까.
# 동물가족과 함께 늘어나는 고민
지난해 보슬이를 보내고 희동이가 약간의 분리불안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희동이 동생을 들일지 말지, 들인다면 어떤 아이를 데려올지 한 달이 넘게 고민했다. 태어난 지 만 2개월 됐다는데도 500g밖에 안 됐던 작디작은 포메라니안 기찬이를 데려오고, 성까지 최가 성을 떡하니 붙여 동물등록을 마쳤다.
희동이는 기찬이를 아주 좋아했다. 기찬이도 형을 귀찮을 정도로 따라다녔다.
뒤이어 누군가 이사하며 두고 갔다는 진도혼종이 인연이 닿았다. 만화 주인공 중 순하고 착한 캐릭터의 이름을 따 호야라고 부르고 있다.
다 커도 2.8㎏이었다가 중성화수술 후 3㎏을 넘긴 최기찬은 집안에서, 15㎏정도 되는 호야는 마당에 묶여 살고 있다.
호야를 묶어 기르면서 또 한 번의 딜레마를 겪었다. 희동이와 기찬이는 더우면 에어컨, 추우면 보일러를 틀어가며 집안에서 자유롭게 살고, 매순간 예쁨 받는데 호야는 혼자 밖에서 추위, 더위, 고립감, 외로움과 싸우며 지내야 하니 미안했다.
호야는 덩치도 작지는 않고, 착하기는 하지만 뭘 잘 몰라 목줄만 풀리면 찻길인지 어딘지도 모르고 내달리는 통에 위험천만하기도 했다. 동네 길고양이들을 쫓아 남의 밭에 들어가기도 했고, 안쓰러워 일부러 헐겁게 묶어둔 목줄을 어느새 아침에 풀고 또 내달려 하루종일 찾지 못하다가 저녁시간까지 집근처만 뱅뱅 돌며 술래잡기 끝에 잡혀 들어오기도 여러 번이었다.
아이를 잃어버리는 것도, 동네 어른들이 정성껏 키운 농작물을 망치는 것도 큰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고령의 어른들이 많고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는 동네라 호야가 천지분간 못하고 날뛰다 물기라도 하면 어쩌나 아찔했다.
내가 좋다고 해서 남들까지 내 강아지들이 다 예쁜 건 아니다. 그래서 묶어 기르기로 했다. 1미터 목줄이 주는 수많은 문제들을 익히 알고 있어 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억지로 합리화했다.
호야는 깔끔한 성격이다. 집 근처에서는 변을 보지 않는다. 그러니 시골 개한테 흔히 나는 개냄새가 안 난다. 대신 하루 네다섯 번의 산책을 나가야 한다. 산책길에 풀밭에서만 볼일을 보는 호야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말 못하는 짐승에게 변을 참으랄 수 없으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책은 나가야 한다. 가족들은 호야의 대변을 변봉투에 담아 집에 와서 처리한다.
어쩔 수 없이 목줄을 채워두고 있는 호야와 나름대로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고 있는 집안 강아지들과의 생활은 시간이 갈수록 비교됐다. 그리고 늘 밖에 있는 호야에게 미안하다. 현실적인 문제들과 부딪히면서 ‘동물복지’에 대해 수많은 생각과 고민을 거듭했다.
# 고성에서 동물과 반려의 삶
기관지염, 피부염 같은 자잘한 병들이 찾아와서 기찬이는 생후 1년하고도 1개월쯤 돼서야 중성화수술을 했다. 수술하면서 마취한 김에 잔존유치를 발치했고, 문만 열리면 달려나가는 기찬이를 잃어버리면 어쩌나 해서 내장칩을 이식했다. 견주인 최민화의 연락처와 주소, 기찬이의 정보를 담은 마이크로칩은 목덜미에 심었다. 스캔만 하면 주인이 누군지, 강아지의 이름은 뭐고 집은 어딘지가 한 번에 읽혔다.
등록에서 끝인 줄 알았는데 한 달 후 축산과에서 전화가 왔다. 동물등록증이 나왔으니 찾아가거나 등기로 보내준다고. 소문난 개어멈이니 신이 나서 축산과로 냉큼 달려가 등록증을 찾아오고, 동네방네에 우리 애 신분증 나왔다고, 내 성 따서 최기찬이라고 자랑도 했다. 유난스러운 견주이긴 하다.
온라인 카페에 자랑했더니 어느 지역에서는 등록으로 끝이고, 또 어느 지역에서는 공문만 받기도 했고, 또 어딘가는 카드가 나오긴 하더라며 댓글들이 달렸다. 공룡캐릭터가 그려진 고성의 동물등록증이 귀여워 부럽다는 반응도 있었다. 똑같은 동물등록이어도 지역마다 처리방식은 다 다른 모양이었다.혼자 있는 기찬이가 안쓰러워 기찬이 동생 기동이를 데려왔다. 아직 너무 작아 중성화수술이 불가능한 기동이는 조금 더 자라면 또 최기동이라는 이름으로 등록하게 된다.
후에 취재과정에서 알게 된 것이, 고성군내에서 동물등록증을 가진 반려동물은 148마리가 전부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동물등록제라는 것이 같은 지자체 내에서도 등록 가능한 동물병원의 유무에 따라 달라지고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참여율은 그다지 높지 않다.
최근 몇 년 사이 고성의 거리에도 ‘엄마아빠’에게 안겨있거나 목줄, 가슴줄을 하고 산책하는 강아지들이 부쩍 늘었다. 젊은 사람들은 반려동물들의 부족한 활동량을 채워주고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위해 주말이면 외지의 반려동물 놀이터를 찾아가곤 한다.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이 서서히 바뀌고 있다.
고성에서 펫산업이 시작된다고 했다. 그 중에는 유기동물의 보호를 넘어 재입양을 위한 시설도 포함된다는 소식에 관심이 커졌다. 일본과 유럽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다른 나라의 동물에 대한 인식과 우리의 그것을 비교해보기도 했다. 다른 나라가 동물을 대하는 태도와 우리나라의 태도를 비교하면서 답답한 순간도 많았다. 반려동물이 늘고 있지만 또 그만큼 유기동물도 덩달아 늘어나고, 유기견들을 보고 있으면 유행하는 견종을 알 수 있을 정도다.
버려진 동물들 대부분의 말로는 비슷하다. 안락사. 죽음이 안락할 수 있을까. 그러나 예산은 부족하고 개체수는 늘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희동이의 말년을 지켜보면서, 내가 억지로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르지만 기찬이와 호야의 대조된 삶을 보면서 진짜 동물복지가 뭔지 곱씹어봤다. 동물을 대하는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나 하나 바뀐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
더 큰 고민이 시작됐다. 고성에서, 반려동물과 살아가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할까.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