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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만의 귀향

이진만 철성중학교 수석교사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17년 10월 23일
ⓒ (주)고성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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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란만의 바다는 참 포근하다
고유 명절 추석이 코앞에 다가온어느 날 길을 나섰다. 다들 고향을 찾아 길을 나서는데 필자에게는 찾아갈 고향이 없다. 고개 너머 통영이 고향이지만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시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바닷가의 고향집은 매립으로 흔적이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어딘가 고향의 냄새가나는 바다를 찾아볼 요량이었다. 
고성읍에서 자동차로 50분을 달려 자란만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덕명리에 도착했다. 하이면 덕명리는 고성의 서쪽 끝으로 세월에 씻긴 자갈들이 자그락거리는 소리와 작은 바람에 윤슬이 흔들리는 바다 풍경이 고향의 앞바다를 가장 많이 닮은 곳이다. 특히 안장섬 사이로 보이는 해돋이와 상족암 앞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해넘이가 일품으로 꼽히는 고성의 숨은 명소이다. 남쪽으로는 사량도가 거만하게 누워 자란만을 바람과 파도로부터 지켜주고 있고, 동쪽으로는 상족암의 누운 주상절리와병풍바위의 선 주상절리가 어울려절경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두 가지의 지형을 한 자리에서 볼 수있는 유일한 곳이다.자란만의 바다는 사람을 참 편안하게 해준다. 
우선 여성의 가슴처럼 생겨 유방섬이라 불리는 안장섬이 맥전포 앞바다의 아늑한 풍경과 더불어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게 방문객을 맞아준다. 맥전포 방파제에서병풍바위 데크길을 따라 상족암으로가는 길은 몇 번을 걸어도 새롭고 싫증이 나지 않는 곳으로, 바닷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최고의 산책길로꼽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운치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산책이 끝날 쯤에서 만나는 시골스러운 카페에 들러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유람선 선착장 옆에 있는 작은 카페는 겉보기는 허술해 보이지만 고풍스런 구조에 외국에서 가져온 다양한 다기(茶器)로 장식된 독특한 실내 분위기가차 맛을 돋운다. 게다가 덤으로 꽃잎차를 내놓는 주인아주머니의 편안한미소가 자란만의 물빛을 더욱 맑게한다. 가슴을 데우는 차 향기에 잊고있었던 고향의 따뜻함이 온 몸을 감싼다.카페를 나와 해변가를 따라 조금만더 가면 ‘가마랑?’을 만난다. 옹기를굽던 가마터가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런데 가마 이름이 특이하다. 그냥 ‘가마’가 아닌 ‘가마랑?’이다. 가마와 한몸이 되어 살겠다는 주인장의 마음은 알겠는데 그 뒤에 붙은 물음표의의미는 헤아려보기가 어렵다. 주인장의 독특한 철학이 담겨 있으리라는 짐작을 해 본다.

# 덕명리 가마골의 꿈
덕명리는 이전부터 옹기의 생산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약 140년 전부터 다수의 가마터가 만들어져 많은 옹기를 생산했으며, 품질이 좋아인근 지역을 비롯하여 내륙이나 외국까지 보내졌다고 한다. 주생산품은 해안가라는 지역적 특성에 따라문어단지를 비롯한 어구를 중심으로다양한 생활 옹기를 만들었다.또한 덕명리는 옹기를 굽는데 있어최적의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우선 바다와 가까워서 옹기를 굽기 위한 자재를 수급하는데 편리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인근에 산림이 울창하여 땔감을 구하기도 쉬웠다. 그리고 옹기의 재료가 되는 진흙 역시 배편으로 실어올 수 있어 편리했다. 이렇게 자재 조달도 그렇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상품의 유통이었다.
다행히도 덕명리는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다.덕명리는 해상에서 육지로 가는 길목으로 사천과 진주를 거쳐 내륙으로 올라가는 지름길이었다. 그러다보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왜군들의 침략의 길목이었고, 6·25 전쟁 때는 인근 통영과 거제로 가기 위한 인민군들의 남침 통로였다. 해상과 육상 교통을 모두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 위치적 조건은 옹기를 널리 보급할 수 있는 실크로드로 활용될 수 있었다.
이처럼 한때 옹기의 고장으로 불리던 가마골의 명성이 세월의 비바람에 흔들려 사라져 가고 있다. 값싼 알루미늄이나 멜라민 수지 재질의 간편한 그릇 종류가 쏟아지면서 경제성에 밀려 가마들은 차츰 폐업의 길로 들어섰다. 세월의 무상함이라고할까? 50년대 전후만 해도 네 개의가마터가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겨우 하나만 남았다. 마지막 남은 가마골의 흔적이다. ‘가마랑’의 가마도 불을 피운지가 20년이 지났다. 그리고 가마터에서일했던 마지막 장인도 10년 전쯤에세상을 떠나 이제 가마의 따뜻한 온기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40년 가마골의 역사가 전설로 묻히고 있다고 할까? 마지막 남은 가마터를 지키고 있는 김동인 사장님이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다.김동인 사장님은 부산 출신의 사업가이다. 외국에 오랫동안 머무르다가 돌아와 남해안의 절경을 배경으로 해양레저 사업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덕명리에 정착하였다. 그런김 사장님의 눈에 띈 것이 스러져가는 가마터였다. 유람선을 띄울 곳을찾다가 우연히 가마터를 보게 된 것이다. 가마가 있는 장소는 일명 ‘숨은땅’이라고 불린다. 가마터에서는 바깥이 훤하게 보이지만 밖에서는 잘보이지 않는 곳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길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잡초에 덮여 숨어 있던 가마가 눈에 띈것은 김 사장님과 가마 사이에 특별한 인연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김 사장님은 가마라든지 옹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옹기 가마의 알수 없는 매력에 이끌려 그 길로 지주를 찾아 땅을 구입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다른 새로운 삶을 구상했다. 덕명리 가마골의 보존과 복원을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가마 제작에 참여했던 마지막 기능자를 찾아 가마를 최대한 원형에가깝게 복원했다. 다음은 가마터 옆에 전시관을 짓고 희소성이 있는 다양한 옹기를 수집하였다. 전국에 있는 골동품 가게를 찾아다니며 좋은상품이 나오면 천금도 아끼지 않고구입을 했다. 그러다보니 전시관에는 가격을 따지기 어려울 만큼 진귀한 옹기들이 많다.김 사장님의 꿈은 덕명리 가마골의 명성을 되살릴 옹기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다. 생활옹기를 통해 조상들의 지혜를 배울 수 있도록 더 이상잊히기 전에 흔적을 찾아 남겨야 한다는 것이 가마랑 주인장의 바램이었다. 그런 김 사장님의 뜻이 하늘에통해서였을까? 얼마 전에 ‘가마골의잊힘’을 거부하는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약 30여 년 전에 일본으로 보냈던 옹기 하나가 고향인 덕명리로돌아온 것이다. 주변에서 흔하게 볼수 있는 평범한 옹기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이 옹기가 가치를 가지는것은 옆면에 ‘장명(長命)’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장명’은 옹기를 판매하는 일본 회사의 이름으로 덕명리에서 OEM 방식으로 만들어 일본에 수출한 상품이다. 그릇에 찍힌 글자는김 사장님이 가마를 수리하면서 쓰레기통에서 주워놓은 낙인과 일치하였다. 30년 만에 고향을 찾은 ‘장명옹기’의 마음은 어떨까? 가마골의 명성을 잃어버린 고향을 보면서 필자와 동병상련의 비애를 느끼고 있는것은 아닐까? 말 못하는 미물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김 사장님은 옹기를낙인과 함께 나란히 전시하였다.

# 만남과 인연이 이어지는 곳
전시장의 야외는 테마별로, 실내는용도별로 옹기가 전시되어 있다. 하나같이 국립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한 보물들로 일일이 거론하기힘들 만큼 종류도 그렇고 수량도 많다. 이렇게 많은 보물들을 모으고 공부한 주인장의 열정이 놀랍기만 하다. 다만 이런 거창한 프로젝트를 개인의 능력으로 진행하다 보니 운영의 한계가 느껴져서 안타까웠다. 우선 모은 옹기를 전시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공간은 터무니없이 좁았다.
더 넓은 공간을 구해서 체계적인 전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료가 많기도 하지만 아직도 수집이 진행 중인 관계로 자료에 대한 도록(都錄)이 없는 것도 문제점 중의 하나였다. 잊혀져가는 것을 후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자료에 대한 기록은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옹기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전시장 마당 한쪽에 참 볼품없이생긴 옹기가 하나 놓여 있다. 약 90여 년 전에 충청도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여기저기 굴러 다녔는지 긁힌 자국을 비롯하여 흠집이 많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뚜껑이 달아나고 없다는 것이었다. 모양이 특이하다보니 거기에 꼭 맞는 뚜껑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들른 골동품 가게에서 폐품으로 버리는 뚜껑 하나를 발견하였다.최근에 만든 것으로 주물럭거리다가말았는지 유약마저 제대로 바르지않은 조잡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김사장님은 그것을 보는 순간 갑자기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집에 가져와서 마당 한 쪽에 던져둔 옹기에 얹어보니 잃어버린 뚜껑처럼 꼭 맞아 떨어진 것이다. 
지역과 시간을 초월하는 만남의 순간이었다.김 사장님이 꿈꾸는 옹기 전시장의의미는 ‘만남과 인연의 장소’이다.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던 옹기몸체와 뚜껑의 만남, 3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옹기와 낙인의 만남, 해양레저 사업가와 가마터의 만남, 이모든 것이 인연이 없었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가마랑’은 만남과 인연이 만들어 놓은 곳이다. 덕명리 가마골에 왔기에 옹기와의 만남이 있었고, 옹기가 있기에 지금도사람과 사람의 인연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누가 언제 와도 고향에 온느낌을 받을 수 있게 가마랑을 편안한 장소로 만들고 싶다는 것이 김 사장님의 소망이다.가마랑 앞 해변에는 깨진 옹기 조각이 물결에 따라 굴러다닌다. 모서리가 뭉개진 게 세월의 흔적을 느낄수 있다. 아직도 남아있는 유약의 흔적으로 다양한 색채를 띤 조각들이맑은 물에 씻겨 그런지 보석처럼 영롱하다. 가마골의 복원을 바라는 옹기지킴이 김동인 사장님의 꿈이 꼭이루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덕명리가마골의 역사와 문화를 다시 만날수 있기를 바란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17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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