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① 고성독립운동, 잊혀진 현장을 찾다
② 고성청년들, 일본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다
③ 나는 그리고 우리는 자랑스러운 조선인이오
④ 꺼지지 않는 조선독립의 불꽃 서울에서 피다
⑤ 조선 독립의 열망,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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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고성신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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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거북이를 마치 신주단지 모시듯 헝겊에 싸두고, 조석으로 웅얼웅얼 알 수 없는 말들을 해댔다.
때로는 히죽거리기도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했다. 모진 고문을 견디다 못해 정신을 놓아버린 것이라고들 했다. 일본순사들은 그런 그를 지켜보다가도 혀를 차며 그냥 돌아서곤 했다. 미쳤으니 더 이상 감시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그들은 몰랐다.
미치광이 스님의 눈에 가득한 매서운 독기를. 그 독기는 마치 칼끝처럼 날카롭게 날이 선 채로 일제를 향해 있었다. 미치광이 노릇은 사냥감을 노리는 매처럼 때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언제고 다시 빼앗긴 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불꽃처럼 일어설 터였다.
# 초승달의 이름을 가진 미치광이 스님
일제의 감시를 피해 죽은 거북이와 대화하는 듯 미치광이 행세를 했던 그는 불교계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백초월 스님이다.1878년 고성군 영오면 성곡리에서 태어난 어린 인영은 지리산 영원사로 출가했다.
겨우 14살 적의 일이다. 스승인 남파 스님은 어린 인영에게 초월(初月)이라는 법명을 지어줬다. 그때만 해도 그저 수행하는 승려로서의 삶을 살 것이라 믿었다. 초월스님은 20대 중반 이미 조실을 맡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경학실력이 평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30대 초반에 이미 대강백 즉 큰스님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니 그는 시대의 지식인이었을 것이다.1905년, 세상이 달라졌다.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통치권이 일본에 넘어갔다. 5년 후인 1910년에는 보호조약이라는 미명 하에 대한제국의 모든 것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버렸다. 불교계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1910년 임제종운동이 시작됐다.
일본의 불교가 한국의 불교를 통제하지 못하도록 했던 임제종운동에는 만해 한용운을 비롯해 익히 알려진 불교계 인물들이 대거 합류해 힘을 실었다.
초월스님은 명진학교에서 이름을 바꾸고 1915년 개교한 중앙학림의 초대강사로 내정됐다. 중앙학림은 동국대학교의 전신이다. 하지만 스님은 취임하지 못했다. 출가 본사인 영원사가 1911년 큰 화재로 가람이 전소되다시피 했다. 스님은 지리산으로 돌아갔다.영원사의 재건과 불교 포교를 위해 매진하던 초월스님은 화엄경의 한 구절에서 빛을 찾았다. 통만법명일심(統萬法明一心). 이 짧은 한 줄은 스님의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초월스님은 우리 민족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면 나라가 독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일심교(一心敎)라는 항일이념을 정비하고, 비밀항일조직인 일심회(一心會)를 조직했다.
# 불교계 독립운동의 산실, 은평구 진관사
2009년 5월. 서울 은평구 진관사에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칠성각을 조심스럽게 뜯어내던 인부 한 명이 스님을 찾았다. 희한한 보따리 하나가 칠성각 뒤에 숨어 있었다. 보따리를 풀던 스님의 시선이 보따리의 귀퉁이에 가 닿자마자 손이 떨려왔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보통 물건이 아니구나.’진관사 태극기는 90년의 세월을 깨고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왔다. 지금과는 다른 괘를 가진 진관사 태극기는 당시 일일이 바느질해 만들었던 태극기와는 달리, 일장기 위에 태극문양과 괘가 덧그려졌다.
태극기가 감싼 것은 독립신문을 비롯한 항일운동자료들이었다. 당시에는 가지고만 있어도 처벌을 피할 수 없었던 자료들이었고, 지금은 독립운동사 전체의 흐름을 바꿔놓을 수도 있는 귀한 자료들이다.1919년 4월. 기록상으로는 초월스님의 독립운동이 시작된 시점이다. 상경한 초월스님은 중앙학림 안에 한국민단본부를 만들었다. 비밀독립운동조직인 민단에서는 군자금을 모았다. 하지만 만해가 초월스님을 민족대표 33인에 포함시키려 했다는 증언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미 그 이전부터 초월스님은 불교계 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이었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만해 한용운이 민족대표 33인으로 피체된 후 이미 그 실력과 명성이 검증된 초월스님이 자연스럽게 지도자 역할을 맡게 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1919년 7월에는 상해임시정부는 물론 항일단체의 활동을 담은 혁신공보를 발행하고 사장직에 앉는다. 그리고 임정과 국내 조직간의 비밀연락망 연통제로 국내에서 모은 군자금과 독립운동 인력들을 상해, 만주로 보냈다.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은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해외에서도 은밀히 활동하고 있었다. 스님은 해외에서 만든 항일운동 관련 신문들을 국내로 들여와 배포했다.
진관사 태극기가 품고 있던 것들이 바로 이 자료들이다. 같은 신문이 두 부씩 있는 것은 물론 해외 자료까지 있는 것으로 볼 때 일부 학자들은 스님이 기거했던 진관사가 연통제 조직의 서울연락본부 혹은 중앙본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진관사 태극기와 함께 발견된 신문들은 대부분 1919년 6월부터 12월 사이에 발행된 자료들이다. 이런 정황들로 보자면 당시 수 차례 일본경찰에 피체돼 옥고를 치르며 신변의 위협을 감지한 초월스님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칠성각에 직접 숨겼을 것이다.
# 북한산 아래 백초월길을 따라
스님과의 조우2017년 여름의 은평구 진관사 입구는 한옥마을 조성으로 꽤 요란했다. 멀리서도 뻑적지근한 흑색 기와가 눈에 띄었다. 초월스님이 일제에 항거했을 것 같은 분위기가 도통 나질 않았다. 오래된 처마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이 자리를 지켰을 법한 것은 북한산의 흰 바위들뿐이었다.길 끝을 기웃거리는데 번쩍이며 눈을 쏘는 것이 있다. 백초월길. 그렇게 100년 전의 스님을 만났다.
백초월길을 들어서니 방금 전의 소란과는 다른 세계다. 100년 전에도 여전히 노래했을 계곡이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일주문을 지나자 온도가 바뀌었다. 계곡 어딘가의 바위에서 스님이 툭툭 털고 일어나 합장할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묘한 생각과 서늘한 숲의 바람줄기 덕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오르는 길에 등산객과 산책 나온 진관동 주민들 몇몇을 마주쳤다. 초월스님이 그렇게 치열한 시간을 보낸 길이 이제는 스님의 이름을 따 붙이고도 그 서슬 퍼런 기운은 사라지고 주민들의 쉼터가 된다니, 생경했다.진관사는 여전히 공사 중이었지만 아주 오래 전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연꽃이 핀 나가원을 지나 너른 절마당을 가로질러 칠성각으로 향했다. 칠성각 안에는 촛불이 일렁이고 있었다.칠성각은 해체 보수를 거쳤어도 여전히 100년 전의 모습과 같았다. 금빛 석불좌상을 가운데 두고 후불탱 칠성도와 명호스님 영정이 내려다 본다. 모르고 봤다면 대체 어디에 태극기가 있었다는 건가 싶었겠다.
초월스님이 태극기를 숨긴 칠성각 불단과 기둥 사이는 성인남자 손끝에서 팔꿈치까지 될까 말까하다. 해체보수공사를 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초월스님의 태극기는 이 좁은 벽 사이에서 잠들어 있었을지 모른다.
# 오리무중의 문너머 절집, 극락암
1939년 10월, 철도국 노동자 박수남이 용산역에서 만주로 향하는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는 격문을 남기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수남은 체포됐고 일경은 주동자 색출에 눈이 번뜩였다. 필적을 추적하던 일경에게 글씨의 주인이 드러났다. 초월스님의 글씨였다.주동자였던 초월스님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61세, 당시로선 고령이었다. 심지어 승려였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스님의 사진은 이때 찍혔다.
수형자카드에 남길 기록으로.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지만 스님은 3년이 지나도 나오지 못했다. 대전형무소와 청주형무소로 계속 이감됐다. 그토록 바라던 해방을 1년 2개월 앞두고 스님은 청주형무소에서 눈을 감았다.
형무소에서 순국한 유일한 승려였다.이왕이면 스님의 행적을 좇아보자 싶었다. 여의도 마포대교에서 홍대 방향으로 바라보면 제일 먼저 보이는 동그란 빌딩. 그 뒤에 스님이 마지막으로 기거했던 극락암이 있다. 산비탈에 겨우 몸뚱이를 의지하고 있는 것만 같은데 이름은 극락이라 한다. 일제의 모진 고문을 끝끝내 버텨내고 또다시 독립운동에의 재기를 노리던 스님이 이 절집에 있었다.극락암은 연락도 없이 찾아간 터라 문조차 열어보지 못했다. 고요한 문 안의 풍경이 도통 그려지지 않았다. 마치 스님의 행적처럼 오리무중의 도심 속 절집이었다.
# 고성의 바람에 나부끼는 진관사 태극기
승려였던 탓에 후손을 남길 수 없었다. 스님 막냇동생의 아들 백남기 씨가 1991년 사망한 후 남은 혈육은 백외식 씨다. 스님의 증손자다. 백외식 씨가 어린 시절 아버지 백남기 씨는 집안의 훌륭한 독립운동가에 대해 말씀하시곤 했다. 그리고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초월스님의 조카 백남기 씨가 20대 시절에는 지독하게 가난했다.
배를 곯는 일도 다반사였다. 궁리 끝에 삼촌이 초월스님이니 혹시 절에 가면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을까 싶어 찾아갔다. 스님은 마포의 포교당인 극락암에 있다고 했다.서울까지 올라간 백남기 씨가 막 마포에 들어섰을 때다. 포승줄에 묶여 일본경찰에 연행되던 스님과 마주쳤다. 영문을 알 수가 없어 멍하니 바라만 보고 서있었다. 옆에 있던 친척이 떠밀었다. 여기 있다가는 큰일난다고. 그게 조카 백남기 씨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삼촌의 모습이었다.
1980년대, 독립기념관 건립을 위한 모금이 시작됐다. 조카 백남기 씨는 아들인 백외식 씨와 함께 삼촌의 이름 석 자라도 찾기 위해 전국을 떠돌았다. 몇 년간 모은 자료를 국가보훈처에 보냈고, 1986년 건국포장, 4년 후인 1990년에는 재심사를 거쳐 애국장으로 추서됐다.진관사가 있는 은평구에서 먼저 스님이 알려졌다. 뒤늦게나마 고성에서도 스님의 선양사업에 나섰다. 고성읍내에는 두 개의 태극기가 나부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규격태극기와 초월스님의 진관사 태극기가 나란히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뜨끈해지고, 코가 매워진다. 왜 우리는 몰랐을까, 왜 그렇게 늦게 알았을까.지금껏 스님의 유해는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했다.
청주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것만 알았을 뿐 아직 시신조차 찾을 수 없다. 다만 오는 4일, 스님의 위패만은 국립서울현충원에 봉안될 예정이다. 부디 그렇게라도 스님이 영원한 휴식을 얻기를.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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