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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대한독립의 열망이 들끓던 곳입니다

100년을 거슬러, 기억해야 할 역사를 마주하다
고성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구만면
교육으로 항일정신을 키운 철성의숙과 송광학교
노동운동으로 일제에 대항한 여성 항일운동가, 이금복

최민화 기자 / 입력 : 2017년 08월 14일
글 싣는 순서
① 고성독립운동, 잊혀진 현장을 찾다
② 고성청년들, 일본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다
③ 나는 그리고 우리는 자랑스러운 조선인이오
④ 꺼지지 않는 조선독립의 불꽃 서울에서 피다
⑤ 조선 독립의 열망,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다

ⓒ (주)고성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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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고성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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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은 여전히 평화로운 시골마을이다.
그래서 한국전쟁의 생채기조차도 다른 지역보다 적었다.그보다 앞선 일제강점기, 고성군은 나라 독립의 열망으로 들끓었던 곳이다.그러나 정작 고성사람들은 고성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정보 부족이기도 하고 그간 재조명 시도의 부족 탓이기도하다. 잊혀진 고성군의 독립운동사, 100년의시간을 거슬러 그 현장을 추적해본다.

# 국천변의 나팔소리, 고성 최초의 만세운동
한학을 공부하던 사내가 1919년 고종의 인산에 갔다가 3.1운동에 참가했다.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 길로 고향에 내려와 동지들을 모았다. 거사일은 3월 20일. 배둔장날이었다. 
사내의 집 사랑채에서 은밀한 작전이 시작됐다. 동지들은 밤이면 그의 사랑채로 모여들어 목소리를 최대한 낮춘 채로 거사를 논의했다.
독립선언서를 요약해 필사했다. 그리고 한밤을 틈타 인근 12개 동리에 전달했다. 누구에게도 새어나가서는 안 됐다. 그러나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동참해야 했다.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됐다.
고종의 인산에 다녀왔던 최낙종을 필두로허재기와 최정주, 최낙희, 이종홍. 그 외에도수많은 인물들이 뜻을 같이 했다.
거사일 오후 1시. 최낙호가 최낙종의 집 뒷산에 올랐다. 최낙호의 나팔소리와 함께 사람들은 국천변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최정원이 나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허재기는 공약 3장을 지킬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군중들은 배둔장까지 10리길을 걸으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늘 억눌린 채로 살았던 조선인들의 기개에일본헌병들은 흠칫했다. 국상 중이라 평양립을 썼던 최정주는 그런 일본헌병을 조롱했다. 군중은 그들을 에워싸고 성토했고 나팔수들은 나팔을 불어대며 몰아붙였다. 헌병대는 길을 터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목표지점인 배둔장터로 향했다. 그리고 단 한 명의희생자도 없이 해산했다. 이것이 고성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다.

# 고성은 무엇 때문에 행하지 않는가
1919년 3월 15일 밤. 이주현이 철성의숙을찾았다. 그의 손에는 독립선언서가 들려있었다. 이주현은 박거수와 박진완에게 고성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가져온 독립선언서를 놓고 갔다.
박거수와 박진완은 배만두와 이상은, 김상욱과 함께 거사를 논했다. 날짜는 그로부터이틀 후인 3월 17일이었다.
박거수의 집과 철성의숙이 본거지가 됐고,태극기가 찍혀 나왔다. 모든 것은 은밀하게진행되고 있었다. 박효수가 경영하는 고성읍내 시장 일용잡화점 철성상회는 만세운동의출발점이었다.
3월 17일 새벽. 날이 밝으면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참이었다. 배만두의 집에 일본 헌병들이 들이닥쳤다. 사전에 계획이 누설돼버린것이다. 주동자 중 한 명인 배만두가 구류된상황에서도 만세운동 준비는 멈추지 않았다.
도쿄에서 영어학교에 다니다 귀국한 안태원과 부산상업학교 학생 서주조가 나섰다.고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지금 각지에서는 일개 농부까지도 죽음을두려워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하는데 고성은무엇 때문에 이를 행하지 않는가? 지금은 수수방관할 때가 아니다!”
3월 22일 정오. 안태원과 서주조를 중심으로 학생 200여 명이 고성읍 시장에 모여들었다. 품고 있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장터의 사람들도 합세했다. 일본 헌병과 경찰이 총검을 들이댔다. 시위대열은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기개와 정신은 고성사람들을 자각하게 했다. 나라를찾아야 한다고, 백성이 나서야 나라를 되살린다고.

# 교육으로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
고성의 만세운동은 ‘의숙’과 역사를 같이한다. 철성의숙에서 시작된 1919년 3월 고성읍 만세운동이 그랬고, 같은 해 4월 2일 송광의숙(송계의숙)에서 있었던 대가면 송계리 만세운동이 그랬다. 두 의숙 모두 민족교육기관이었다. 그러니 항일은 너무도 당연한교육이념이었다.
일본에서 개화문물을 배우고 돌아온 무량산인 박거수는 1908년, ‘사람은 알아야 하고,알아야만 사람다운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육영신조를 갖고 학교를 설립했다. 국은(國恩),사은(師恩), 부은(父恩) 즉 삼은(三恩)을 교육목표로 한 이 학교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것이 목적이었다. 행사 때마다 애국가를불렀다. 기미년 독립만세운동 이후에는 3.1절 기념행사로 소운동회를 개최했고, 개천절이면 대운동회가 열렸으며 그때마다 전교생에게 시루떡을 나눠줬으니 배곯던 시절의 아이들에게는 낙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운동회때면 엽총으로 신호탄을 쏘며 일제에 무언의 위협을 했다. 그리고 학교 주변에는 나라꽃 무궁화를 심어 독립사상을 전했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대가저수지 둑 아래, 철성의숙이었다. 1917년에는 박맹룡이 철성의숙 야학부를 설립해 운영했다.
고성의 청소년을 교육하고 계몽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철성의숙이지만 현실의 벽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박거수는 마산에서 해산물과 곡물, 주단 등을 판해매 그 수익의 일부를 상해 임시정부정치자금으로 보내기 위한 원동무역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또한 무학동 김재익의 집터를 빌려 양잠을 하고 수익금은 학생들과 청년단의 경비로 사용하며 청년들의 자활정신을 키워줬다.
1927년 서울로 떠난 이듬해였다. 1928년음력 3월 23일 서울 태평로에서 박거수는 교통사고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떴다. 철성의숙역시 그의 운명과 비슷했던가 보다.
박거수가 세상을 뜬 후 경비문제 등 운영상의 어려움을 겪던 철성의숙을 폐교시키려일제는 애를 썼다. 일제의 탄압은 점차 심해졌다. 1929년 10월, 철성의숙야학부를 포함해 고성농민야학부, 교동야학회, 무량야학회까지 고성의 모든 사설강습소 설립이 불허됐다. 
철성의숙은 내부를 쇄신한 후 다시 허가원을 제출했다. 그러나 당국에서는 교수를중단하게 했다. 결국 철성의숙은 허가가 떨어질 때까지 무기한 휴학할 수밖에 없었다.이후 박경수가 신간회를 통해 자금을 지원하면서 복교됐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송계의숙으로 알려진 송광의숙은 개교 당시 송광학교였다.
나라를 빼앗겨도 그 혼은 영원하다는 뜻의혼불망 사상을 심어준 민족교육기관이었다.폐교된 송계초등학교 자리에서 약 10년동안나라의 독립을 위해 존립했다. 그리고 1919년 4월, 송광학교 학생들은 독립만세운동을주도했다. 송계리 주민들은 1914년부터 송계초등학교 운동장 부지에 사설강습소인 송광학교가 있었다고 증언한다.
혼불망 사상을 심어준 교사 유득신은 의열단원이었다. 그가 송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던 것은 1920년대였고 송계리 만세운동이1919년이었으니 송광학교의 항일정신은 언제나 살아있었던 것이다.

# 경술국치 그리고 그녀, 이금복
이금복은 1910년 하일면 오방리에서 태어났다. 딸은 학교 문턱조차 쳐다보지 못하던시절에 그래도 보통학교 3학년까지는 다녔다. 17살 먹던 해에 남편 박대영과 결혼했다.그러나 결혼한 지 4년쯤 된 1932년 6월, 남편은 삼천포독서회 사건으로 도피해야 했다.그때 이금복은 시동생 박대홍을 통해 사상서적을 접하면서 신사상을 깨달았다.
1934년, 그녀는 부산 목도조선법랑철기주식회사에 취직했다. 일제의 노동착취가 점점 심해지던 시기였다. 그녀는 초장동 집에서 공장연구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여공과더불어’라는 제목의 격문을 인쇄해 배포하다옥고를 치렀다.
고성으로 돌아온 그녀는 용산독서회를 조직하고, 삼천포적색노동조합에 가입해 학생들에게 항일정신을 전했다. 부산에서 일할적에 가입해 재조직을 위해 뛰었던 단체가적색노동조합이었다.
그러다 150여 명이 체포됐다. 그 중 여성은이금복이 유일했다. 이 사건으로 이금복은1939년 8월 30일, 부산지법 진주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9월 2일 석방됐다.
그러나 이금복의 항일활동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광복 이후부터 60년이 넘는 세월을 평범한 촌부로 살았다. 사망 두 해 전인2008년에서야 진주 향토사학자 추경화 씨의노력으로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그녀의 업적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2010년, 98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여전히 고성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채로.역사를 기억하는 이들은 같은 땅에서 같은시간을 호흡하며 살아온 이들이다. 
그러니 고성의 항일운동은 고성사람들을 통해 세상에 알려져야 한다. 그리고 다르고, 틀리게 기억되는 역사는 고성사람들에 의해 바로잡혀야 한다.불과 70년 전의 역사다. 시작은 100년 전이다. 기록보다 오래 가는 것은 어쩌면 기억이다. 우리는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최민화 기자 / 입력 : 2017년 0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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