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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고성신문사 |
# 외로운 돌 하나, 거산리 고인돌
고성읍 송학삼거리에서 동해면으로 가는 지방도를 따라 6킬로쯤 가면 거산삼거리가 나온다. 계속 가면 한내를 지나 동해면으로 들어가고, 좌회전하면 창원으로 가는 14호선 국도를 만나게 되는 갈림길이다. 무심코 지나다니는 길이지만 잠깐 가던 길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면 많은 역사적 유물과 이야기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거산삼거리에 서서 마암면 삼락리 쪽으로 논 가운데 섬인 듯 작은 언덕이 보이고 꼭대기에 큰 돌 하나가 외로이 놓여 있다. ‘거산리 지석묘’라고 불리는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남방식 고인돌이 넓은 들판 가운데 평평하게 놓여 있는데 비해 거산리 고인돌은 유독 돌로 쌓은 동산 위에 덩그러니 올려져 있어 특이한 느낌을 준다. 고인돌은 일명 ‘지석묘’라고 널리 불리며, 말 그대로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얹은 무덤이다. 뚜껑 구실을 하는 넓은 덮개돌을 여러 개의 굄돌이 받치고 있다고 해서 고인돌인데, 우리나라 남방식 고인돌은 굄돌이 뚜렷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땅 위에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는 구덩이식 고인돌이 대부분이다. 거산리 고인돌 역시 남방식의 대표적인 양식을 그대로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산 형태의 특이한 모습을 갖추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일반적으로 고인돌은 인근에 최소 몇 개의 무덤이 함께 있게 마련인데 거산리의 고인돌은 왜 하나만 남아 있을까? 거기에는 말하기에는 참 난처하지만 거류면 거산리의 고인돌에는 부끄럽고 아픈 상처가 숨어 있다.
해방 이후에만 해도 거산리 고인돌 주변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고인돌이 함께 있었다고 한다. 당시는 지금처럼 정리된 논이 아닌 돌무더기가 흩어져 있는 갯가의 황무지였고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당시 사람들은 고인돌의 역사적 가치를 몰랐다. 유적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던 시절이다보니 훗날 대단한 지역적 자산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고인돌은 쓸데없는 돌무더기였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이 돌들이 긴요하게 쓰일 일이 생겼다. 1960년에 인근에 다리가 만들어지면서 방조제에 많은 돌과 흙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거류면 앞바다는 일명 속싯개로 불리는 곳으로 고성천의 민물과 당항만의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다. 특히 임진왜란 때 두 차례의 당항포 해전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전사(戰史)에서 보듯이 큰 배들이 드나들 정도로 넓은 수로였다. 그러나 물살이 세어 배가 드나들기에는 위험한 지역이었다. 그러다보니 거류면 거산리와 마암면 삼락리 동네 주민들은 뻔히 보이는 가까운 동네임에도 불구하고 오고가는 것이 힘들었으며 간혹 거센 물길에 배가 수몰하는 사고가 나기도 했다. 거기에 맞추어 해방 이후 우리 국민 모두가 겪어야 했던 경제적 어려움은 한 톨이라도 더 많은 식량을 얻기 위해 더 많은 논밭이 필요했다. 그 해결책으로 나온 것이 거산리 황무지의 개간이었다. 황무지를 개간하여 나온 흙과 돌을 이용하여 두 지역을 잇는 다리를 놓는 것이었다. 다리를 건설함으로 두 지역을 오가는 안전한 통로가 만들어짐과 동시에 인근 주변 산과 들판의 쓸모없던 돌과 흙을 치워 논밭을 만듦으로 인근 7개 마을 300여 농가의 터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간사지 다리 공사는 당시 사업비 3억6천만 원이나 드는 거대한 토목사업이었다. 비록 지금은 초라하게 놓여있지만 간사지교의 역사적 가치는 크다. 바다를 메우고 다리를 놓는 공사는 해방 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간사지교가 만들어졌을 때는 인근의 사람들이 일부러 다리를 구경하러 많이 몰려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간사지 다리 공사는 불행하게도 역사적 유물인 고인돌을 방조제의 기초석으로 사용함으로 무지(無智)의 오명(汚名)을 남기게 되었다. 그나마 하나 남은 거산리 고인돌이 마을의 무사태평과 풍년을 기원하며 매년 섣달그믐에 동제(洞祭)를 지낼 때 이용한 이유로 살아남았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할까? 친구들을 잃고 홀로 남게 된 고인돌이 더욱 외로워 보인다.
# 유적에 대한 무지로 만든 다리
고인돌이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는 아주 크다. 고인돌은 선사 시대의 유적으로 고성의 역사를 청동기 시대로 끌어 올린다. 현재 고성에는 66개의 고인돌이 남아 있다. 하일 오방리 지석묘를 비롯하여 고성군 전역에 고인돌과 선사유적지가 분포되어 있다. 그러나 모두 다 합쳐도 거류면 거산리에 있던 고인돌보다 적다. 인근 주민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돌’들이 있었다고 하니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우리나라 최고의 고인돌 분포지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아무리 무지에 의한 일이었다고 하지만 생각할수록 아쉬운 일이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이제 없어진 고인돌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카메라를 들고 간사지 다리를 건넜다. 사방공사를 하느라고 새 길을 만들고 있었다. 공사용 장비들과 출입주의를 알리는 팻말이 놓여 다소 산만스러운 모습이다. 다리 옆에는 간사지 다리를 놓는데 큰 공헌을 한 2대 국회의원 김정실(金正實) 씨의 기념비가 서 있었다. 토목 사업 내용을 메모하고는 행여나 다리 공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지 수소문을 해보았다. 마침 근처에서 낚싯대를 놓고 있는 노인 한 분을 만났다. 삼락리에서 65년째 살고 있다는 이른 살이 넘은 어르신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공사를 옆에서 지켜보신 분이셨다. 다리 건설 과정에 있었던 에피소드 몇 개를 들려 주셨다. 그러나 그 분의 기억에도 한계가 있었다. 공사 당시 어린 나이라서 돌을 지고 나르는 것을 구경만 했을 뿐 돌들이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지를 못했다. 다만 간사지 다리의 역사와 의의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들을 수가 있었다.
우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간사지 다리가 1960년 당시에 처음 만든 다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다를 질러 만든 다리라는 큰 의의를 가진 원래의 다리는 수문 옆에 있는 작은 다리이다. 처음에는 사람과 수레나 건너는 다리였지만, 이후 자동차가 다니고 통행량이 많아지면서 붕괴 위험이 있어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다리는 1998년에 다시 신축한 것이다. 그리고 이름도 그대로 이어받아 ‘간사지교’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간사지 다리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냥 다리가 아니라 고인돌로 만든 세계 유일의 다리라는 것이다. 비록 무지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래도 아직 고인돌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까?
노인과 함께 바닷가쪽으로 내려가 다리와 방조제 주변을 돌아보았다. 수문 옆에서 시작하여 거산리 쪽으로 길게 방파제가 만들어져 있는데 큰 돌이 층층이 쌓인 돌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은 그 돌들이 거산리의 고인돌이라는 확답을 내놓지 않았다. 고인돌로 다리를 놓으신 분들이나 마찬가지로 고인돌에 대한 정확한 개념조차 모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이 드신 분들의 무지를 추궁하는 것 같아 더 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그러나 유적에 문외한인 필자가 보기에도 큰 것은 대문짝만하여 보통 접하는 고인돌과 비슷한 크기였고, 생긴 모습이 언뜻 보기에도 예사 물건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노인의 말대로라면 큰 돌로 먼저 바닷물을 막기 위한 방파제를 먼저 만들고 수문을 마지막에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토목 기술로는 이렇게 큰 돌을 먼 곳에서 대량으로 가져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파제에 쓰인 돌들이 인근에서 가져온 고인돌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러나 추측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전문가의 조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직도 고인돌이 남아있다
역사학자들은 고성에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한 때를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으로 보고 있다. 청동기 문화가 시작된 때이다. 고성의 청동기 시대 유적은 고성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과 취락(聚落) 유적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내산리 고분군과 더불어 거산리 고인돌은 고성 들판의 농업과 남해안의 해양 교통을 배경으로 하면서 살던 부족국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런 중요한 흔적이 주민들의 무지로 인해 훼손된 점은 정말 아쉽다. 조금만 더 일찍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면 고성의 역사는 여러 면에서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는 굶주림 해결과 주민 불편 해소가 절대 선(善)이었기에 다리를 만든 선인들의 숭고한 뜻을 욕되게할 생각은 없다. 다만 지금이라도 방파제에 쓰인 고인돌을 복구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실현이 된다면 고창이나 강화보다 더 큰 고인돌 공원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간사지 다리는 고인돌로 만든 다리라는 유명세를 탈 것이며, 고인돌 발굴로 인해 주민들의 지역에 대한 애향심마저 더 키울 수도 있지 않을까?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은 ‘가야사 연구 및 복원 필요성’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가야사의 지역적 범위가 넓어 영호남 통합에 이바지할 수 있는 사업이라는 취지에서다. 마찬가지로 소가야의 연구 및 복원은 인근 통영과 거제뿐만 아니라 소가야의 영역이었다고 볼 수 있는 광양만까지 아우를 수 있는 큰 사업이다. 고성이 어떻게 남부 해안 지역의 중심국가가 될 수 있었는지를 알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사업이다. 그렇다면 소가야의 재건은 거산리 고인돌의 복원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지금도 간사지 다리 한 쪽에서는 새로운 수문을 만들기 위한 토목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공사가 끝날 쯤에는 지금보다 고인돌이 더 많이 훼손될 것이다. 복원을 할 수 있다면 하루 빨리 시작해야 한다. 먼저 전문가들의 검증을 마친 후에 역사적으로 보존의 가치가 있는가를 따져보고 가능성이 있다면 복원을 해야 할 것이다. 행정 당국의 빠른 조치를 바란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