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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고성신문사 |
고성신문 시민기자회는 6월 11일,12일 양일간 조선통신사 행렬이 지나갔던 옛길, 조선통신사 발자취를따라가는 대마도 역사 탐방길에 올랐다.아침 일찍 부산 국제여객선터미널에 도착하자 배를 타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우리를 태운 오션플라워호는바다 위를 미끄러지듯이 달려 1시간10여분 만에 대마도 북쪽 히타카츠국제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했다.역사와 자연이 함께 하는 가깝고도먼 나라 대마도는 두 개의 섬이 마치말이 대항하는 모습같아 보인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88%가 편백나무 숲으로 관광지를 찾아 다니기보다는 자연을 즐기고 역사를 체험하는 섬이다.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우리의 땅이었던 한국문화가 살아있는 대마도는백제, 신라, 가야의 선진문물을 대마도를 거쳐 일본 열도에 전달하는 중간거점 역할을 하면서 고대 사회부터 우리와 깊은 인연을 맺어 왔다. 대마도는 한반도와 교류를 통해 생존과 성쇠가 좌우되고 지금도 한해에20만이 넘는 한국관광객이 대마도를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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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우다 해수욕장→ 한국 전망대→와타즈미 신사
전용버스를 타고 첫 일정은 일본의 아름다운 해변으로 선정되어 있는 유명한 미우다 해수욕장을 찾았다. 해운대처럼 크지는 않지만 물이맑고 모래사장이 예쁜 풍경이다.잃어버린 우리 땅이었던 가슴 아픈대마도이지만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모래사장을 걸어보았다. 미우다해변을 떠나 편백나무 숲길을 달려한국 전망대로 향했다. 바다 위에 떠있는 양식장은 진주와 참치 양식장이라고 한다. 걸어서 한참을 올라가전망대에 이르니 우리의 팔각정 같은 느낌이다. 날씨가 좋으면 부산 광안리와 거제가 보인다고 한다. 일본사람들은 망원경을 들고 와서 광안리 불꽃축제를 구경한다고 한다. 우리 땅이었어야 하는데 안타깝다. 일제 강점기 때 대마도에 잡혀갔던 많은 한국인이 이곳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망향의 서러움을 달랬던 곳이기도 하다.
# 와타즈미 신사
버스를 타고 산속 꼬불꼬불 길을따라 들어가니 넓은 바다 위에 도리이(鳥居․신사 입구의 문)가 놓여져있고, 일본의 건국 신화에 나오는 천신과 해신을 모신 와타즈미 신사가나왔다.일본은 다신교로서 우리나라의 전통신앙 칠성신, 산신, 성황당 같은 신사는 일본고유의 문화이자 일본의힘이라고 한다. 자연 재해가 많은 일본 사람들은 모든 세상 만물에 신이있다고 믿고 수백만의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왕, 장군, 신하, 물고기, 새, 도자기, 심지어는 고양이도 모셔놓고 믿는다. 일본에는10만개가 넘는 신사가 있는데 나라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마을마다 구석구석 신사를 모셔두고 진학, 취직,졸업 등 중요한 날이 있을 때마다 가족들이 모여서 감사와 축하의 기원을 올린다. 그 중에서 우리가 싫어하는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의 전범자를 모셔놓은 곳으로 일본의 아베 총리가 참배를 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아베 총리의 참배는 일제 강점을합법화하고 또 다시 전쟁을 일으킬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한국인을 참수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했는데 참다운 신앙이라고 할 수가있는지?
# 역사의 도시 이즈하라, 최익현선생 순국비→ 덕혜옹주 봉축비→조선통신사 기념비
이즈하라는 대마도의 역사, 문화중심지이며 대마도 시청 소재지다.대마도 인구 3만 5천 명 정도에 그중 1만 6천 명이 이곳에 모여 산다.이즈하라는 걸어 다니면서 관람을다 할 수 있는 작고 좁은 마을이다.
# 최익현 선생 순국비
6월 호국보훈의 달. 둘째 날은 우리 민족의 아픔이 있는 면암 최익현선생의 순국비가 있는 수선사를 찾았다. 최익현 선생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그만두고 고종이즉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고종을 탄생시킨 일등 공신이다.1905년 을사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되자 최익현 선생은 수많은 유림을 의병을 모아 일본에 대항했으나곧 잡혀 대마도로 유배되었고 선생의 상투를 자르려고 하자 거부를 하며 왜놈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하여 단식 투쟁을 하다가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위해는 백제 승려 법묘스님이 창건했다는 수신사에 임시로 모셔졌고 열흘 후 아들에 의해 선영이 있는 충남 예산으로 모셔 갔다.순국비 옆에는 무궁화나무 몇 그루가 있어 애잔함은 더했다.
# 덕혜옹주 봉축비
덕혜옹주의 슬픔이 있는 대마도를눈물의 섬이라고도 한다.공주에 비해 서열이 낮은 옹주는역사적으로 조명받지 못했지만 덕혜옹주는 고종의 사랑을 독차지했다.덕혜옹주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조선의 추억을 일깨워주는 상징이었다. 어린 시절 고종의 의문 죽음후 공포에 휩싸여 살았고, 신식여성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간뒤에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런 그녀를 일본은 대마도주의 세손쇼 다케유케 백작과 정략결혼을 통해 가둬 버렸다. 그 후로 병세가 더악화되어 남편에게 버림받고 말년에고국으로 돌아와 낙선재에 안주했지만 영혼이 없는 그녀의 육신은 77세의 나이로 새처럼 날아갔다. 덕혜 옹주 결혼 봉축비 앞에는 조화와 한국동전 몇 개가 놓여 있었다.
# 조선통신사 기념비
목적지이다. 일본은 최고지도자가명목상으로는 천황이지만 실제로는군사 실력자 ‘막부’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장군의 자리에 올라 통치했다.요즘도 대통령 취임식 때 해외 사절단을 초빙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장군이 취임할 때마다 일본은 조선과 각종 외교를 협의하기 위해 사절단을 교환했는데 이를 ‘통신사’라고불렀다.1429년(세종 11년)에 처음 파견되었고 그 당시에는 왜구 금지 요청과막부 습직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임진왜란을 계기로 통신사는 단절되었고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도쿠카와 막부가 들어서면서 일본측의 끈질긴 요구로 재개되었다.조선은 문(文)을 숭배하고 무(武)를 천시하는 성리학이었다면 일본은무를 숭배하는 사무라이였지만 조선의 선진 문물을 숭배했고 문화적으로 우월한 조선으로부터 선진문화를받아들이는 것도 시급한 일 중 하나였다. 조선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끌려간 포로 송환 문제가 있었고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도쿠카와 ‘막부’권력 승인이라는 의미를 지녔으므로일본에게도 조선에게도 다 같이 실리가 있다는 것이 작용했다.1607년 재개하여 1811년까지 약200년 간 12차례 행해진 외교사절단으로 조선과 일본의 공식 통로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각 분야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최고의 재능을 가진400∼500명으로 이루어진 대 사절단이다. 쇼군(최고 지도자)의 계승이있을 때마다 방문하여 조선국왕의국서를 전달하고 쇼군의 답서를 받아왔다. 통신사는 국빈으로서 대접을 받았고 일행에는 문인과 서화가,역관 등이 동행했고 일본의 지식인들은 회담을 통해 유교 경전이나 성리학을 전달받으며 역사, 풍물, 화풍등을 익히면서 조선 문화의 우월성에 크게 감응했다. 이런 문화의 힘을바탕으로 믿음의 외교를 할 수가 있었다.한양을 출발한 통신사 일행은 충주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어 영천, 경주,울산을 지나 부산에 도착하여 일본으로 향하는 배를 띄울 때까지 기다렸다. 목숨을 건 바닷길이었기에 임금은 통신사 일행을 애처롭게 떠나보냈다고 한다. 바다를 건너는 두려움을 해신제로 달래던 영가대(永嘉臺)는 현재 부산 범일동에 유적지로남아 있다.주요 집결지였던 부산시와 영천시는 통신사의 정신을 잇기 위해 전별연이나 마상재(달리는 말위에서 곡예) 공연이 열리는 축제를 매년 5월에 개최하고 있다.대마도는 우리보다 20년 앞서 조선통신사 일행을 재현하는 ‘아리랑미쯔리’행사가 매년 8월 첫째 일요일에 열리고 있다. 이때 대마도 주민들은 한복으로 갈아입고 행사에 참여하며 부산 동래 구청장이 초청되어정사(正使)가 타던 가마를 타고 그호위도 대마도 시민이 한다고 한다.대마도 번은 통신사 일행을 대마도로 안내하여 대마도에서 다시 수로와 육로를 이용해서 시모노세키→모모노우라→ 오사카→ 히코메→ 나고야를 거쳐 에도(도쿄)에 도착했다.왕복 3천㎞로 6개월에서 1년이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지금 현재 국토대장정의 원류가 되기도 했던 조선통신사길을 일본과한국의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바다를 건너며 풍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일본 여인과의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는 이도 있었다.현재 전해지고 있는 ‘조선통신사의사랑’이라는 노래는 조선통신사와아름다운 사랑을 나누었던 일본 여인의 실화를 노래한 남자 가수 SoulCry(소울 크라이)이다. 이 노래는2020년 도쿄 올림픽 축하 음반으로수록되어 있다.400∼500명의 통신사 일행을 맞이하는데 1천400여 척의 배와 1만여 명의 인원이 일본 측에서 동원되었고 모든 경비도 충당했다.조선통신사를 영접하는 일은 당시일본 전국의 주요 행사로 간주되었으며 그만큼 조선이 일본에게 중요했던 것이다.통신사 일행이 지나가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는데 5∼6시간 소요되는데 일본 사람들은 도시락을준비하여 아침부터 연도(沿道)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일본은 전 국민적 축제 분위기 속에서 통신사를 맞이했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으며 통신사의 숙소에서수행원으로부터 글씨와 시를 받으려고 몰려든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일본의 화가들은 다투어 통신사 일행의 활동을 대형 병풍, 판화두루마리 그림으로 그렸는데 수 많은 작품이 일본에 남아 한국과 일본은 이 또한 유네스코 기록 유산으로등재시키려고 하고 있다.1607∼1811년까지 조선과 일본은평화로운 관계가 지속되었지만 일본에 서양 문물이 들어오고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면서 조선통신사는 단절되고 그 후로 침략과 비침략의 외교가 지속되고 있다.우리는 일본과의 문제를 조선통신사를 통해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를 고민하는 뜻깊은 역사 문화 탐방이 되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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