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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고성신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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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세상을 향한 창문이다
어릴 때는 유달리 책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에 찰 만큼 많은 책을 읽지는 못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종이 한 장도 귀한 시절이었다. 종이 대신 밀가루 포대를 잘라 공책을 만들어 쓰고, 교과서도 이웃반 친구들과 돌려보던 시절이다 보니 책을 본다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또 책 읽을 시간도 넉넉하지 않았다. 집안일을 돕느라고 학교도 빼먹기 일쑤였던 터라 책을 손에 쥐고 있다가는 게으름 피운다는 어른들의 호통을 듣기 십상이었다. 그래도 책읽기를 좋아했던 필자는 책이 보이면 닥치는 대로 읽고 또 읽었다. 시집이나 동화책은 학교 도서관에서 얻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 도서관이라고 해도 책 보유량이 적어 지금의 학급문고 수준을 겨우 벗어날 정도여서 두어 달이면 거의 섭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다 친구 집에 책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잘 모르는 친구라도 염치 불구하고 찾아가 빌려 읽었다. 그리고 읽은 내용은 학교 가는 길에 동네 친구들에게 들려주곤 했다.비린내가 진동하는 작은 어촌에 사는 소년에게 있어 책은 또 다른 세상을 곁눈질해 볼 수 있는 창문이었고 다른 사람과 나누는 대화의 시작이었다. 책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내는 도구였다. 그렇게 책을 통해서 들여다본 바깥세상은 훗날 필자가 살아가는 삶의 여정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 사람책 도서관은 무엇일까?
지난 6월 2일은 제22회 ‘환경의 날’이었다. 세계적 관심사가 된 환경 문제를 되돌아보기 위해 경상남도에서는 지속가능발전협의회 주최로 경남도청 서부청사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환경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었다. 행사장에는 청소년들을 비롯하여 많은 시민들이 다녀가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음을 보여주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행사를 알리는 대형 풍선이 청사 건물에 달리고 여기저기에 현수막과 함께 부스가 설치되어 한껏 축제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이미 전날부터 시작된 행사라 이력이 나서 운영에 소홀함은 없었다. 부스는 환경보호를 비롯해서 에너지 절약, 동식물 보호 등 환경과 관련된 홍보나 체험활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행사에 참여하는 주체들이 대부분 청소년들이라는 것이다. 일부 사회단체를 비롯하여 성인들이 운영하는 동아리의 참여도 있지만 부스 대부분이 학교를 중심으로 환경 관련 활동을 하고 있는 청소년 동아리들로 채워져 있었다. 환경 문제가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닐진대 어른들도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날 행사 중에 특이한 아이템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사람책 도서관 in 경남’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행사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넓은 공간이 좁다고 느껴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마치 시골 장날을 보는 것처럼 시끌벅적하였다. 다양한 사람책들이 책 주제에 맞는 옷차림으로 독자들을 유혹하고 있고, 사람책을 구독하기 위해 청소년 독자들이 줄을 섰다.‘사람책’이 무엇이고 ‘사람책 도서관’은 무엇일까? 생소한 용어이다. 그러나 익숙지 않은 낱말임에도 불구하고 ‘아하! 이런 것이겠구나’하는 짐작이 간다. 말 그대로 종이책 대신 사람이 책으로 활용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포장이 그럴듯할 뿐이지 이미 오래 전부터 진로교육이나 상담에서 많이 활용하고 있는 도구이다. 다만 사람책을 모아 집단 소통을 하는 도서관의 개념은 참신한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책 도서관과 리빙 라이브러리 이외에도 휴먼 라이브러리, 사람 도서관, 살아있는 도서관, 숨 쉬는 도서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몇 년 전부터 여러 지역에서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사람책 도서관’ 프로그램이 소통과 학습 도구로 먼저 개발된 곳은 덴마크이다. 사회운동가인 로니 에버겔이 창안하여 리빙 라이브러리(Living Library)라고 불리는 이 도구는 빠른 속도로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신개념의 ‘이벤트성 도서관’이다. ‘사람책 도서관’은 다양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삶을 책 목록으로 만들어 독자들과 만나게 한다. 그리고 독자들이 취향에 맞는 책을 골라 직접 소통하게 하는 방법으로 운영된다. 사람책은 평소 살아온 삶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는 것이기에 특별한 준비가 필요 없다. 독자 역시 그냥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마음으로 참가하면 된다. 지식이 아닌 지혜를 전하는 책이기에 종이책보다 부담감이 적다. 그리고 눈으로 읽는 독서가 아닌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며 손으로 직접 만져보는 살아있는 책이기에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즉석에서 질문을 통해 답을 구할 수도 있다.
# 사람책은 바깥을 들여다보는 문
행사가 시작되었다. 청사 마당 한 편에 그늘막을 만들고 원탁 탁자에 책과 독자들이 둘러 앉았다. 참가한 사람들은 이런 행사에 몇 번 참가를 해본 경험이 있는지 사람책들이나 독자들이나 모두 표정이 밝고 스스럼이 없다. 처음 행사에 참가하는 필자로서는 그런 풍경이 도리어 경이로웠다. 다행스럽게도 도서관 운영에 경험이 많은 사회자가 매끄러운 진행으로 첫 만남의 어색함을 풀어 주었다.이번 행사의 주제는 ‘사람과 자연을 잇다’였다. 자연(自然)은 ‘사람과 물질의 고유성이나 본연성’을 말한다. 물질 뿐만 아니라 사람도 자연에 속한다. 결국 사람과 자연의 만남이라고 하는 것은 넓게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된다. 또한 삼라만상의 고유성이나 본연성은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소통이 되지 않고 갇혀 있으면 고유성은 변질되고 본연성은 썩게 마련이다. 사람들 역시 소통하지 않으면 의식이 곪게 마련이다. 특히 현대인들은 자신만의 아집에 갇혀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런 연유로 소통을 통해 많은 사람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얻자는 것이 사람책 도서관 행사 저변에 깔린 주제이다.이번에 선정된 책은 모두 44권으로 지역 사회에서 특이한 활동을 하거나 재능을 가진 인물을 모아 엮었다. 도서 목록을 보면 책 이름도 특이하지만 책의 직업도 다양하다. ‘맥주 소믈리에 씨서론에 도전하다’, ‘농사짓는 문구점 알바’, ‘망해 봤수다, 대박도 나 봤수다’, ‘정원을 가꾸는 요리사’ 등의 제목으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책으로 참가하였다. 옷차림도 다양하다. 농부가 되고자 하는 모 의원님은 평소 입던 양복대신 농부 차림으로 나왔고, 씨서론을 꿈꾸는 젊은 사람책은 술 따르는 에셩송 차림으로 행사에 참가하였다.책이 되는 사람은 꼭 사회적으로 명망가나 성공한 사람들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런 사람들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편견의 대상으로 사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도 많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분야와 위치에서 보람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이나 남들보다 더 굴곡진 인생을 산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타인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없애자는 것이 사람책의 목적이다. 필자 역시 그런 평범한 책 중의 한 권이었다. 필자의 책 이름은 '문어발 선생님'이다. ‘국어 교사’라는 직업을 떠나 지역 사회에서 행하고 있는 다양한 활동을 모두 '교육'이라는 큰 그릇에 담아낸다는 아이템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다.사람책들은 자신이 청소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독자들은 종이책을 읽는 것보다 더 솔깃하게 귀를 기울였다. 소통이 목적이었기에 논쟁은 필요 없었다. 혼자만의 독서가 아닌 다수가 한 자리에서 읽는 책읽기였기에 서로를 배려하였다. 독자들은 사람책을 존중하여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사람책이 독자들에게 더 친절했던 것 같다. 사람책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읽어주는 독자가 고마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신을 선택한 독자들이 후회하지 않도록 독자들을 대하였다. 심지어 부록으로 독자들이 꼭 필요할 만한 작은 선물을 준비한 사람책도 있었다.
# 책은 진화하고 있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책이 없어 책읽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서점마다 책들이 넘쳐흐르고, 공공도서관에서는 무료로 책을 빌려준다. 예전에는 작가라는 이름을 가지고 책을 출판하는 것이 대단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누구나 작가가 되고 출판을 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이젠 지체도 못할 만큼 많은 책들이 주변에 뒹굴고 있다. 그러나 책에 굶주리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필자에게는 아직도 책은 소중하고 귀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책을 읽고 때때로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그럴 때마다 문득 떠오르는 것은 어린 시절에 내 이야기를 진지한 표정으로 들어주던 친구들의 표정이다. 단순히 책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친구들과 더욱 친해졌고 몇몇 친구는 지금도 가끔 연락을 주고받을 만큼 가깝게 지내고 있다. 들려주는 이야기와, 책 내용으로 주고받은 대화들. 이것이 사람책의 시작이 아닐까?이제 책이 진화하고 있다. 활자로 찍힌 종이책에서 작가가 직접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책으로 바뀌고 있다. 소통이 부족한 시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회를 뒤덮고 있는 요즘에 정말 괜찮은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든다. 청소년들에게는 사람책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한 막연함을 해소하고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벗어나 자연과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기회가 될 것이다. 성인들에게도 삶의 동반자를 얻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벗어날 수 있는 멋진 기회가 될 것이다.의미 있으면서 재미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지역이나 일선 학교에서도 운영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적극 추천해본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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