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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고성신문사 |
| 1960년대 말, 누구나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 14살의 소녀는 마산 교방동 이재민들의 구호물품 나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20년이 훌쩍 지나 형편이 좀 나지고 소녀에서 갓 중년으로 들어선 그녀는 단발머리이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내 고향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고성군여성단체협의회 이외숙 회장의 이야기다.
“1987년 9월 30일. 아직까지도 절대 못 잊는 날입니다. 어찌 보면 새로운 삶을 시작한, 두 번째 생일 같은 날이지요.”
그녀는 30여 년 전, 대한적십자사봉사회원으로 첫 봉사를 시작하던 날을 아직도 정확히 기억한다. 이외숙 회장은 결혼을 하고 다시 고향 고성으로 돌아와 1남2녀의 아이들과 남편의 뒷바라지에 바빴다. 아이들이 조금 자라 엄마의 손길이 덜 필요할 때쯤 그녀는 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의 원장이 권유한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14살 여중생으로, 당시 비만 오면 물난리가 났던 마산 교방동에서 이재민 구호물품을 나르던 시절을 떠올렸다.
“늘 베푸는 친정어머니를 보고 자랐으니 나눔은 습관 같은 것이었습니다. 나이가 들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누는 것만큼 좋은 교육은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녀의 친정어머니는 목욕탕에서 노인들의 등을 미는 일조차도 공을 들였다. 이외숙 회장의 아이들도 고성JC 등 단체에 가입해 봉사한다. 봉사와 나눔은 대를 잇는 모양이다.
이 회장의 남편은 유교 사상이 몸에 밴, 그러니까 밥상도 대령해야 하는 천생 경상도 남자다. 그러나 그녀에게 봉사 스케줄이 잡힌 날만큼은 상황이 다르다. 아내의 봉사활동만큼은 두말 않고 응원하는 멋진 남편이다. 아이들과 남편의 적극적인 응원과 지원은 그녀의 봉사를 더욱 활발하게 만드는 밑거름이 됐단다.
“집안일도 허투루 할 수가 없어요. 그 덕분에 늘 바쁘지만 제가 베푸는 것보다 더욱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니 어느 하나 가볍게 여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외숙 회장은 예순을 넘긴 지금까지 노인복지 등 사회봉사와 관련된 학업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이제 그녀는 회원이 아닌 회장으로, 고성군내 15개 단체, 2천500명의 여성들이 활동하는 여성단체협의회를 이끌어나가야 한다.
올해 고성군여성단체협의회는 다문화가족 지원 사업, 아이 기르기 좋은 환경 조성사업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업무를 보조할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라 어깨가 무겁다.
“고성군여성단체협의회가 더 활성화되고, 사업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회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회원들의 역량과 기술을 개발해 여성단체가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 늘 배우는 자세로 노력하겠습니다. 저는 ‘하고잡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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