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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독립투사입니다”

고성박물관 광복 70주년 기념 특별전 우리 지역 독립운동가 전시
/자료제공=고성박물관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5년 08월 29일
ⓒ 고성신문

고성박물관은 광복 70주년을 기념하여 오는 11월 30일까지 4개월 동안 기획전시실에서 특별전을 하고 있다.
이번 특별전은 ‘나의 아버지는 독립투사입니

다’라는 주제로 근세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우리의 뼈아픈 시대사와 그 속에서 꽃핀 영광스런 고성지역의 독립 운동사를 다루고 있다.
고성박물관의 자료를 통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자신을 불사르며 조국 독립에 투신한 고성 지역의 독립 운동가들을 재조명한다.


 


# 배만두(?~ 1972.3.10)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났으며, 고성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고 1914년 무렵부터 서울로 올라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기독교청년회가 경영하는 야학에 다니며 학업을 쌓는 가운데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학업을 마친 후에는 창덕궁 수비대에 입대하여 신식 군사훈련을 익히게 되었다. 이후 황실수비대가 해산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일제의 식민정책에 시달리고 있는 동포들을 보며 망국의 통한을 절감하고 독립운동의 의지를 다짐하였다.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배만두는 고성읍 덕선리에서 철성의숙을 열어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던 박진완의 연락을 받고 이상은․김상욱과 함께 진주사람 이주현을 만나 고성에서 만세의거를 결행할 것을 협의하였다.
거사일을 앞두고 밤새워 태극기를 만드는 한편 학생들을 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분주하게 준비하였다. 그러나 3월 17일 새벽 일본 헌병이 배만두의 가택을 수색하고 그를 체포하면서 만세시위운동은 결행되지 못하였다.
만세시위는 3월 22일 고성읍 장터에서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때 배만두는 일본 헌병 보조원으로 있던 조선인의 도움으로 경찰서에서 탈출하여 만주로 떠났다.
그는 통화현에 있던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여 일찍이 황실수비대에서 훈련받은 경험을 토대로 신병훈련을 보조하였다. 1921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독립군 이청천부대의 예하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청산리전투 이후 일본군의 대토벌작전을 피하여 우수리강을 건너 소련으로 넘어가 활동하다가 흑하사변이 발생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만주로 돌아온 배만두는 독립군의 밀명으로 함경도지방에서 군자금모집과 독립군 초모공작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37년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일제의 감시와 통제가 더욱 강화되는 가운데 오랜 망명세월에 병을 얻어 고성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정세권과 함께 조선물산운동에 참여하면서 백일공작사라는 건설사를 설립하여 운영하면서 애국지사들을 지원하는 등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사회단체와 한독당 등에 관여하였고, 육영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 심재인(1918.10.13 ~ 1946. 6.27)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고성면 성내동 336번지에 주소를 두었다. 1938년 일본 장기현 소재 간조농학교에 재학하던 중 일본인들의 한국인 학생에 대한 차별대우를 체험하면서 민족적 각성에 이른 그는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 4월 장기현 간조시 선월정에 있는 임우칠의 집에서 이상만, 박근철 등과 함께 비밀결사 재일학생단을 조직하고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과 농업정책 등에 반대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중일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독립운동의 방안을 협의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심재인은 1941년 간조농학교를 졸업하고 우도궁고등농림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도 일본에서 동지를 규합하였으며, 귀국한 동지들을 통해 국내의 조직을 확대하여 거점을 확보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1942년 경북 예천의 동지 이상만 등이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있던 중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어 80여명의 동지들이 체포되었는데, 심재인 역시 연루자로 피체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1943년 5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및 육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이상만(1919. 5.28 ~ 1944. 1.31)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38년 일본 구주 장기현 농업학교에 재학하면서 비밀결사 단체인 삼인단을 조직하여 항일활동에 참여하였다.
귀국 후 그는 1941년 부산의 곡물검사소와 경북 예천출장소에 근무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1942년 동지들과 더불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1943년 7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허재기(1887.10.28 ~ 1969.12. 7)
경남 구만면 저연리에서 태어났으며, 3.1만세운동 주도와 독립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20일의 회화면 배둔리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허재기 열사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구만면의 청년 유지인 최정주, 최낙희, 최정원 등과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그는 이들과 함께 한문학자 이종홍에게 독립선언서를 요약해 줄 것을 부탁해서 그것을 필사하여 밤사이에 12개 동리에 전달하였다.
3월 30일 오후 1시경, 나팔소리를 신호로 개천리, 마암리 주민들이 국천사장으로 몰려들었다.
여기서 최정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이어 허재기가 등단하여 공약삼장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시위대열은 마침 장날이었던 회화면 배둔리 장터로 시위 행진하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 헌병대는 완전무장으로 도로를 차단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시위대열이 이들에게 접근하자 헌병대가 말을 타고 시위대열로 돌진하였다.
그러나 시위대열은 나팔을 불어대며 저지선을 뚫고 배둔리 장터에 도착하였다.
이때 장터에서는 전날의 연락으로 서찬실, 김갑록, 김동기 등이 시위 군중을 인솔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하였다.
이에 그는 800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 행진하였다.
일제는 그들 재향군인의 협력까지 받으며 시위를 진압하기에 안간힘을 썼으나, 시위대열은 아무런 희생도 없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 구만면으로 돌아왔다.



그는 구만면으로 돌아온 즉시 대한독립동맹 명의로 한인관리 퇴직권고문을 기초하여 이를 구만면사무소 이재홍에게 등사하도록 하여 각 도와 군에 있는 관공서에 우송하였다.
1920년 11월 19일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밀사인 곽정곤과 함께 마암면 장산리의 허종택을 찾아가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계속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같은 해 5월 13일 고등법원에서 이른바 제령 제7호(정치에 관한 처벌의 건)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자료제공=고성박물관 정리=박준현 기자

/자료제공=고성박물관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5년 0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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