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2025-08-01 08:31:56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원격
뉴스 > 칼럼

어느 칼럼니스트의 독백

이진만 철성중학교 수석교사
/이진만철성중학교교사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5년 06월 19일
ⓒ 고성신문

출근하면 사무실 책상 위에 대여섯 개의 신문이 놓여있다. 제목을 훑어보고 두어 개를 골라 관심 있는 기사만 찾아 대강 읽어 본다. 모두 다 읽어볼 틈도 없거니와

대부분의 신문들이 같은 사회적 이슈를 다루고 있어 그 중 하나를 골라 큰 제목만 읽어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래도 신문에서 꼼꼼하게 읽는 게 있다면 사설이나 칼럼이다. 사설과 칼럼에는 신문의 색깔이 있다. 그래서 사설과 칼럼을 읽으면 신문이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래서 신문사들은 사설을 쓸 때 논설위원들이 모여 논지를 결정한다. 주관적이라고 하지만 합리성을 바탕으로 논지를 펼쳐야 하기 때문에 필자 개인의 생각이 배격되고 신문사의 시각을 중시한다.
그러나 칼럼은 사설과 다르다. 칼럼은 논의의 합의물이 아니기 때문에 신문사의 시각과는 관계없이 필자 개인의 성향에 따라 글을 쓴다. 그러다 보니 논지를 살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칼럼은 신문사의 의견과 다를 수 있다는 첨언을 붙이기도 한다. 논지가 독자들의 공감을 얻지 못할 때는 필자 개인 문제를 떠나 신문사의 이미지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칼럼은 위험한 글이다. 사설과는 달리 필자의 개인 성향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럼을 쓴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칼럼은 신변잡기적인 수필과 달리 전문성이 요구되는 글이다. 적절한 주제를 찾는 것에서부터 문제 사안에 대해 치밀한 논증으로 합리성을 높여야 하고, 독자가 읽기 쉽도록 낱말 선택이나 내용의 깊이까지 고려해야 하며,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설득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렇게 칼럼을 쓰는 과정도 쉬운 것이 아니지만 칼럼니스트에게 곤혹스러운 점은 만인에게 필자의 정신세계가 공개된다는 것이다. 특히 좁은 지역 사회의 경우에는 독자들이 글을 쓴 칼럼니스트가 누구인지 알고 있기에 필자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가를 따지기도 한다. 그러기에 아무리 미사여구를 넣어 번듯해 보이는 글을 써도 인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쓴 글은 표리부동의 죽은 글이 된다. 그래서 칼럼을 쓰는 행위는 조심스럽고 위험하다.



칼럼은 개인의 글이며 수필과 같은 친근한 문체로 되어 있지만 글의 내용이 공공성을 지니고 있기에 논설문으로 분류한다. 그러기에 개인 신상의 넋두리를 풀어놓아서는 안 된다. 개인의 사생활이나 취향을 내용으로 하는 순간에 칼럼은 수필로 바뀌게 된다. 칼럼이 논설문이냐 수필이냐 하는 이분법은 중요하지 않지만 독자들에게 주는 영향력이 다르기 때문에 글에 담기는 내용물은 신중해야 한다.



칼럼은 크게 세 가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우선 시사적인 대중매체를 통해 발원되는 만큼 시사성은 필수적이다. 그러기에 문제 제기된 사안이 해결되는 순간 칼럼의 생명은 끝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성격은 비판 의식이다. 사안의 맥락을 비판적 안목에서 짚어내 제대로 논증했을 때 칼럼의 존재가치를 인정받는다. 칼럼이 가져야 할 마지막 성격은 대안의 제시이다. 칼럼은 비판이 생명이지만 반드시 대안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 날카로운 비판은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주지만 대안이 없으면 비난이나 필자의 넋두리로 글의 성격이 변질된다. 그리고 대안을 제시할 때는 그 바탕에 반드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깔려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필자의 혼이 담겨 있는 칼럼이 될 수 있다.
새삼스럽게 칼럼의 성격을 되짚어 보는 것은 일부 칼럼니스트들이 자신의 내면세계를 순화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내보이는 글들을 보면서 타산지석의 기회를 삼고자 함이다.



최근 지역의 지도자라는 인사들이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추태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등 구설수에 오르면서 지역 주민들의 여론이 곱지 못하다. 이에 편승하여 수많은 말과 글들이 떠돈다. 신문마다 논설위원이나 칼럼리스트, 그리고 일반 주민들의 자유 기고까지 다양한 글들이 실린다. 시사를 다루다 보니 당연히 사안에 대한 비판이 따른다. 그러나 일부 글에서는 개인적 인신공격이나 필자의 한풀이로 변질되어 있음을 볼 때가 있다. 사회적 문제에 대해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자신의 지적(知的) 우월감에 빠져, 세상은 모두가 썩었는데 자신만은 고결하며, 잘못된 세상을 제대로 지적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의 글은 자신보다 못하다는 오류에 빠진 것이다.



이런 글을 ‘칼럼의 사족(蛇足)’이라고 한다. 뱀을 잘 그려놓고 거기에 다리를 붙여서 그림을 망쳤다는 고사성어에서 나온 말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격정적으로 글을 쓰는 칼럼니스트들이 잘 빠지는 함정이다.
그 분들의 글을 보면 참 잘 쓴다는 생각을 한다. 내용이 날카롭기도 하면서 정열적이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다. 그리고 필력이 뒤떨어지는 필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글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감히 그 분들의 글에 대해 언급하고 비평을 하는 것은 경망스러운 일이고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일이라 하겠다. 다만 독자로서 그 분들의 글을 볼 때 사족이 없었으면 더욱 멋진 글이 될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요즘의 젊은이들은 사설이나 칼럼을 잘 읽지 않는다고 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구호만 있지 실천이 따르지 않는 우리 사회의 현실과, 비판만 있지 대안이 없는 일부 언론의 사설과 칼럼 탓도 있다고 본다. 특히 사족성 칼럼은 젊은이들에게 ‘잘난 지식인들의 헛구호’로 비춰져 칼럼 읽기를 더욱 멀리하게 한다.



글은 형식이나 꾸밈도 중요하지만 내용이 더 중요하며, 조금 거칠어도 진정성이 우러나오는 글이 좋은 글이다. 읽히는 칼럼이 되려면 독자들에게 화두를 던져 주는 글이 되어야 한다. 사안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만들도록 여론을 만들어 가야 한다. 특히 대안도 없이 주민들의 가려움을 긁어 카타르시스만을 추구하거나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는 칼럼은 지양해야 한다. 글은 열정으로 쓰고 가슴으로 읽는 법이다. 가식이 없는 열정으로 쓴 글이어야만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게 되며 칼럼의 생명이 살아난다.
오늘은 지역신문까지 더해져 책상 위의 신문의 부수가 늘었다. 신문이 많다 보니 기사도 그렇지만 칼럼도 넘쳐 흐른다. 신문마다 칼럼니스트나 자유기고가의 투고까지 합쳐 두어 개 이상의 칼럼이 실려 있다. 참 많기도 하다. 그리고 이 칼럼들을 읽는 사람들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 하는 걱정이 생긴다. 아무리 잘 쓴 명문도 읽히지 않으면 죽은 글이다. 몇 시간을 고민하여 쓴 이 글도 독자들이 대강 제목만 보고 넘어간다면 참 슬픈 일이 될 것이다.



이왕 독자들에게 내보이는 글이면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 다만 매주 칼럼으로 독자를 대하며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글로 인한 갈등과 분열의 재생산이다. 그리고 필자의 글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조심한다. 보잘 것 없는 잡글이지만 건강한 지역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은 것이 어느 칼럼니스트의 독백이다.

/이진만철성중학교교사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5년 06월 19일
- Copyrights ⓒ고성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네이버블로그
이름 비밀번호
개인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포토뉴스
가장 많이 본 뉴스
만평
상호: 고성신문 / 주소: [52943]경남 고성군 고성읍 성내로123-12 JB빌딩 3층 / 사업자등록증 : 612-81-34689 / 발행인 : 백찬문 / 편집인 : 황수경
mail: gosnews@hanmail.net / Tel: 055-674-8377 / Fax : 055-674-8376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남, 다01163 / 등록일 : 1997. 11. 10
Copyright ⓒ 고성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함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백찬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