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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있는 공간을 고성의 객사와 객사마당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이 곳은 고성읍 출신인 안태원 등과 고성보통 교 학생 200여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한 곳으로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고성문화원 관계자는 “만세 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변변한 기념비 하나 없다”며 “이런 실정이다 보니 고성읍에서 기념식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개했다. 고성문화원은 올해 상반기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군 예산 반영 건의를 해 기념비를 세우고 객사와 객사마당을 복원하겠다는 계획이다. 도충홍 문화원장은 “객사와 객사마당은 예순을 넘긴 고성군민에게는 향수를 불러오는 공간”이라며 “고성군의 역사와 얼이 담긴 이 곳을 복원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
객사는 전殿자를 새긴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 패인 전패를 안치하고 관리를 접대하거나 숙박하던 관사로 조선 각지의 지방관은 여기서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望闕禮를 행했다. 망궐례란 매월 초하루와 보름, 또는 왕과 왕비의 생일 및 명절날에 지방관이 전패를 모셔 놓고 절을 올리는 의식이다.
지금부터 100여년 전 1900년대부터 고성읍 성내리 중심부에 약 2천평이나 되는 넓은 마당이 있어 사람들은 객사마당이라고 불렀다. 객사마당이라 했으니 객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 고성군청이 있는 곳은 당시의 수령이 집무하는 고성현의 동헌이 있었다. 동헌을 은선각이라 했고 그 안에는 청심헌이 있었다. 공무를 청정한 마음으로 공정하게 집행하라는 뜻으로 추정된다. 고성현의 동헌을 중심으로 향사당, 양무당, 비장청, 전제소, 작청, 사창, 제민창 등이 배치되어 있었고 동헌과 가까운 곳에 객사인 청해당이 있었다.
객사의 구조는 본사를 중심으로 좌우에 익사를 두고 앞면에는 내·중·외 3문이 있고 옆에는 아영청과 무신사 등 부속건물을 두고 본사는 기와와 돌을 깔고 좌우의 익실은 온돌을 깔았다. 고성의 객사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성의 객사는 1653년 현령 최응천이 재임시 중건했다는 기록과 1734년 현령 김성용이 재임시에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인 세종 때 고성읍성과 같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객사를 청해당이라 불렀다. 고성 사람들은 청해당 대신 객사라고 불렀고 객사가 헐리고 나자 빈터를 객사마당이라고 했다.
이 객사는 1900년 10월 8일 화재로 건물은 물론이고 창고에 보관된 보물급 서책과 물건들이 모두 불탔다고 한다. 그 후에 일제는 객사를 복원하지 않아 빈터로 남게 됐다. 객사 북쪽에는 제법 넓은 못이 있어 후에 메워져 그 곳 역시 객사마당이 됐다. 이후 객사마당은 시장이 됐다. 주로 쌀을 팔아 ‘싸전’이라고 했다. 고성 각지와 이웃 시군에서도 와 시장은 몹시 붐볐으며 밤이면 공짜 영화상영도 했다.
연예인과 서커스단의 공연장, 선거철에는 유세장, 아이들의 놀이터로 사랑받았다. 정월대보름이면 달집을 만들어 소원을 빌었던 공간이기도 하다. 영조시대에는 특별공연단인 야산대가 성행했다. 또 그 자리는 도쿄 정칙영어학교를 다니면서 2.8독립선언에 참여했던 고성읍 성내리 출신의 안태원과 고성보통학교(고성초등학교) 학생 200명이 당시 싸전이었던 객사에 모여 시위를 전개했던 고성의 정신이 살아 있는 곳이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고성의 이름에 걸맞는 역사적인 문화유적을 복원해야 한다는 고성문화원의 객사와 객사마당 복원과 기념비 건립의 추진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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