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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목숨으로 저항했던 서비 최우순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24년 지어진 하일면 학동마을 서비정이 방 되어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윤모씨는 “얼마 전 서비정에 가보니 잡풀이 무성하고 기와 등이 깨어진 채 있어 안타까웠다”며 “큰 의미가 있는 서비정이 방치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군민들은 높은 충정과 고결한 선비 정신의 상징인 고성의 자랑 서비 최우순 선생의 서비정이 방치되고 있다며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학동마을에서 태어난 최우순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신동이었다. 전주 최씨 문중에서 설립한 육영재에서 수학하여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당시 횡행했던 매관매직에 염증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와 오직 독서와 수신으로 학문에 매진한다. 그는 개항 이후 계몽운동에 헌신하고 가뭄으로 인해 흉년이 계속되자 굶주린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일제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에 대해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을 때 최우순 선생은 서부경남 일대의 유림 지사를 규합해 자희산록(紫喜山麓)에서 창검술을 익히며 훈련을 했다. 다른 지방의 의병들과 합류하기 위해 고성읍성으로 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10년 조선의 국권이 일제에게 침탈되자 식음을 전폐하고 두문불출하면서 우국의 정을 달랬다, 그는 자택의 동쪽에 원수의 나라가 있으므로 동쪽으로 난 사립문을 서쪽으로 돌리고 그때부터 자신의 호를 청사에서 서비(西扉)라 고쳤다. 일본은 조선인의 반발이 거세지자 무마할 방책으로 국내의 연로하고 명망이 높으며 추앙을 받는 인사들을 선발하여 금전으로 회유를 하는데 소위 천황의 은사금이라고 했다.
최우순 선생은 은사금 지급대상자로 선정돼 1911년 3월 18일에 일본헌병대 고성분견대장이 일본군 선무대와 기마대원 15명을 앞세워 은사금을 건네며 이후로 의병을 일으키지 말고 일제에 협력할 것을 강요했다. 선생은 이는 은사가 아니라 수사(원수가 주는 물건)이라며 불의한 돈을 받기를 거절했다. 이에 일본군은 강제로 연행을 하려 하자 선생은 “지금은 밤이 깊으니 내일 날이 밝으면 가겠다”고 했다. 선생은 그날 밤 의관을 정제하고 북향재배한 후 음독자결한다. 그의 나이 80세였다.
그의 장례 때는 조문객이 얼마나 많았으며 산의 노루가 잡힐 정도였고 조문객을 태우고 온 말이 10여리에 달할 정도로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1924년 선생의 충절을 흠모한 주민들이 뜻을 모아 도곡산록에 서비정을 건립했다. 나라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과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군민들은 “고성 땅에 이런 고결하고 높은 뜻의 선비가 있었다는 것은 고성의 자랑이며 대단한 긍지를 갖게 한다”며 “이 곳을 잘 보존하면 학동마을 돌담길과 육영재 등과 함께 학생들에게는 교육의 장이, 관광객들에게 고성을 알리는 명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도충홍 고성문화원장은 “행정, 사회단체 등에서 서비정신을 고성정신으로 승화시켜 나가도록 해야 한다”며 “고성문화원에서는 내년에 서비정을 정비하고 역사,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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