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고성신문 | |
고성의 살아있는 역사의 증인인 남산의 소나무를 보호하는 대책이 시급히 강구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남산 입구의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이 소나무 군민들은 남산을 지키는 수문장이나 지킴이와 같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나 이 소나무는 고성의 살아있는 역사의 증인이라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소나무 주변에 잡목이 함께 어우러져 자라고 있어 생장에 치명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주민들은 “남산을 대표하는 나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소나무는 혼자 있을 때 더욱 그 가치를 드러낸다”며 “고성의 살아 있는 역사의 증인인 남산의 소나무를 보호하는 대책이 시급히 강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남산의 소나무가 고성의 살아있는 역사의 증인인 까닭이 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고성에서 먼저 학생항일운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역사적 사건을 지켜보았던 소나무로 그 존재가치가 있다는 주장이다.
1927년 12월 23일 조선인 학생들이 다니는 지금의 고성초등학교 학생 몇몇이 일본인 학생이 다니는 심상소학교(지금의 대성초등학교) 근처에서 대나무를 가지고 죽마놀이를 하고 놀았다. 이 대나무가 일본인 학교 안으로 떨어져 이용진 학생 등 대나무를 줍기 위해 일본인 학교에 들어갔다가 일본인 학생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그 다음날 이용진 학생은 아픔을 참고 학교로 갔으나 몹시 아파 진주도립병원에 입원시켰으나 결국 절명했다. 이에 고성초등학교 5, 6학년 학생 모두는 1928년 1월 31일부터 남산에 모여 등교하지 않고 동맹휴학을 시작했으며 곳곳에서 몇 명 또는 몇십 명씩 모여 “이용진을 살려내라! 이용진을 죽게한 이유를 말하라! 죽도록 때린 일본생도의 이름을 알려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거칠게 항의를 했다.
이에 경찰은 시위행렬을 감시 조사했고 고성의 관공리들까지도 일제히 출동하여 생도나 시민의 동요가 있을까 경비를 삼엄하게 했다. 이 사실은 당시 동아일보, 중외일보는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만약 고성에서도 광주처럼 고등학교가 있었더라면 동맹휴학 정도로 끝나니 않았을 것이라고 의견이 제기된다. 엄혹하기 짝이 없는 일제감정기 하에서 초등학생들이 민족적 공분을 느껴 의기투합한 그 정신은 고성인의 정신으로 길이 보전되어야 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정해룡씨는 “남산의 소나무는 그날, 고성초등학생들이 남산에 모여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궐기하고 목소리를 높여 일본인을 규탄하던 어린 학생들의 목소리와 초롱초롱한 눈동자와 민족적 기개를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고성출신 마산대학교 오식완 총장도 “역사적 사연을 담은 소나무인데 방치되어 있어 자신이 병이 든 듯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