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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사가이며 정치가이고 붓글씨를 잘 쓰신 서예가 이암이 죽자 공민왕이 친히 초상을 그리고 행촌이란 두 글자를 써서 관원을 보내 제사 지내 고성이씨 4대손 이맥 선생은 ‘태백일사’ 지은이
이암(1297~1364·얼굴 사진)은 본관이 고성(固城)이요, 호는 행촌, 시호는 문정(文貞)이시다. 선생님은 우리나라 역사의 뿌리인 단군조선(2096년간) 즉,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쓰신 대역사가이며 정치가이고, 붓글씨를 잘 쓰신 서예가이기도 하다.
단군을 시조로 47대 군왕까지의 업적을 본지 사정으로 모두 기록을 못하고 천하의 명문장인 단군세기 서문과 군왕들의 업적을 간략하게 적었다. 고성은 물론 한국사람으로서 이암 선생과 4대손 이맥(李陌·태백일사 저자) 선생을 모른다면 국민으로서 자신이 한없이 수치스러움을 알아야 할 것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단군세기의 서문(序文)과 47대 군왕의 업적만을 간단히 본지에 실으니 독자제현들은 애국적 차원에서 꼭 한 번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1. 이암 선생님 소개
1) 고려 충렬왕 23년(1297), 경상도 김해, 강원도 회양 부사를 지낸 이우(李瑀)의 장남이자 고성이씨 9세손으로 태어났다.
2) 10세(충렬왕 32, 1306) 때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에 올라 단군왕검의 역사의식을 가슴에 새기고 고려를 동방의 맑고 깨끗한 나라로 일신하겠다고 맹세하였다.
3) 17세(충선왕 6, 1313) 때 문과에 급제, 충정왕 때 찬성사, 좌정승을 지냈고, 공민왕때 철원군(鐵原君에) 봉해졌다. 홍건적 침입 때 임금을 호종하여 1등 공신이 되고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글씨를 잘 써서 동국(東國)의 조자앙이라 일컬어졌고 묵죽(墨竹)을 잘 그렸다. 『서경(書痙)』「태갑(太甲)」편을 옮겨 써서 왕에게 바쳤다.
4) 환국과 배달 역사의 근본을 통하고 환단사상에 대해 깊은 안목을 가진 대학자 조부 이존비(李尊庇)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5) 『단군세기』서문은 신교 문화의 우주관, 신관, 인성론, 수행문화의 근원적 핵심원리를 체계화시킨 만고의 대문장이다.
6) 이암이 죽자(공민왕 13년) 공민왕이 친히 초상을 그리고 행촌이란 두 글자를 써서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냈다. 우왕 1년(1375)에 충정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2. 단군조선 전성기의 통치영역과 삼한 관경
삼한(三韓)의 수도 위치 6세 단군 때 신지 발리는 자신이 지은 서사시 <서효사>에서 삼한의 수도를 저울대(소밀랑, 송화강 아사달), 저울추(안덕향), 저울판(백아강)에 비유하였다. 세 수도가 하나의 저울이 되어 균형을 계속 유지하는 한, 고조선의 태평성대는 보전될 것이라 하였다.『고려사』
3. 단군세기 서문
나라를 위하는 길에는 국민의 사기(士氣)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사학(史學)보다 더 급한 것이 없음은 무엇 때문인가? 사학이 분명하지 않으면 선비의 기개를 진작시킬 수 없고, 국민의 기개가 진작되지 못하면 국가의 근본이 흔들리며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가 갈라지기 때문이다. 대개 역사학의 정법이 잘못된 것은 잘못으로 폄하고 기릴 것은 칭찬해서 인물을 저울질하여 평가하고 시대의 모습을 논하여 진단하는 것이니 만세의 표준이 아닌 것이 없다.
이 백성의 삶은 참으로 유구하다. 새 세상을 열고 질서와 법도를 세운 내용 또한 분명히 밝혀져 있어서, 나라는 역사와 함께 존재하고 사람은 정치와 함께 거론되니, 나라와 역사와 사람과 정치, 이 네 가지는 모두 우리 자신이 우선시하고 소중히 여겨야 할 바로다. 아아! 정치는 그릇과 같고 사람은 도(道)와 같으니, 그릇이 도를 떠나서 어찌 존재할 수 있으며, 나라는 형체(體)와 같고 역사는 혼(魂)과 같으니, 형체가 그 혼을 잃고서 어찌 보존될 수 있겠는가.
도는 그릇을 함께 닦는 자도 나요, 형체와 혼을 함께 키워 가는 자도 나이다. 그러므로 천하만사는 무엇보다 먼저 나를 아는 데 있다. 그런 즉 나를 알려고 할진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겠는가? 대저 삼신일체(삼신과 하나됨)의 도는 ‘무한히 크고 원융무애(在大圓一)하며 하나되는 정신에 있으니, 조화신(造化神)이 내 몸에 내려와 나의 성품(性)이 되고, 교화신(敎化神)이 내려 삼신의 영원한 생명인 나의 목숨(命)이 되며, 치화신(治化神)이 내려 나의 정기(精)가 된다. 그러므로 오직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가 된다. 대저 성(性)이란 인간의 신(神신명)이 생겨나고 자리를 잡는 근거와 바탕이다.
신이 성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성이 곧 신인 것은 아니다. 기(氣)가 환히 빛나 어둡지 않은 것이 곧 참된 성품이다. 그러므로 신(神)은 기(氣)를 떠날 수 없고, 기 또한 신을 떠날 수 없으니, 내 몸 속의 신이 기와 결합된 후에야 내 몸 속의 본래 성품과 (삼신의 영원한 생명인) 나의 목숨을 볼 수 있다.
성품(性은) 저마다 타고난 (삼신의 영원한 생명이 화한) 목숨(命)과 분리될 수 없고, 목숨도 성품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내 몸에 깃든 성품이 목숨과 결합된 뒤라야, 내 몸속에서 신화(神化)하기 이전의 본래 성품과 내 몸에서 기화(氣化)하기 이전의 본래 목숨의(命)의 조화 경계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러한 본성(性)에 담긴 신령스러운 지각의 무궁한 조화능력은 하늘의 신과 그 근원을 같이하고, (삼신의 영원한 생명 자체인)인간의 본래 목숨(命)이 생명으로 발현됨은 자연의 산천과 그 기를 같이하고, 인간의 정기(精)가 자손에게 이어져 영원히 지속함은 창생과 천지의 이상세계를 이루어가는 과업(業)을 함께 하고자 함이다. 이에 하나 속에는 셋(삼신)이 깃들어 있고, 셋(세 손길로 작용하는 삼신)은 하나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원리가 그것이다.(하나 속에 셋이 있고 셋은 그 근본이 하나 속의 신의 조화이다.)
그러므로 (무궁한 일신의 조화에 머무는) 한마음(일심)으로 안정되어 변치 않는 것을 ‘진아(眞我 참을 실현한 나)’라 하고, 신통력으로 온갖 변화를 짓는 것을 ‘일신(一神 하나님)이라 하니, 진아는 우주의 일신이 거처하는 궁전이다.
이 참됨의 근원을 알고 법에 의지해 닦고 행하면 상서로운 기운이 저절로 이르고 신(삼신)의 광명이 항상 비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늘과 하나 되고자 할 때, 진실로 삼신의 계율(참전계)을 굳게 지킬 것을 맹세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능히 이 ‘하나됨의 경지’에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품과 목숨과 정기가 혼연일체의 경계에 계신 분은 ‘삼신과 한 몸이신 상제님’이시다.
상제님은 천지 만물과 혼연히 한 몸이 되시어, 마음과 기운과 몸으로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않으시나 영원히 존재하신다. 그리고 느낌과 호흡과 촉감의 혼연일체의 경지에 계신 분이 인류의 시조인 환인주조(主祖)님이시다. 환인주조님은 세계만방에 한결같이 덕화를 베풀고 즐거움을 함께 누리시며, 하늘·땅·인간 삼계(三界)와 더불어, 함이 없이 저절로 조화를 이루신다.
이러하므로 가르침을 세우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자아를 확립해야 하고, 자신의 형체를 바꾸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무형의 정신을 뜯어 고쳐야 하나니, 이것이 바로 ‘나를 알아 자립을 구하는 유일한 방도’인 것이다. 아, 슬프구나! 부여에 부여의 도(道)가 없어진 후에 한(漢)나라 사람이 부여에 처들어왔고, 고려에 고려의 도가 없어진 후에 몽골이 고려에 쳐들어왔다. 만약 그 당시에 미리 제정되어, 부여에 부여의 도가 있었다면 한나라 사람은 한나라로 쫓겨 가고, 고려에 고려의 도가 있었다면 몽골인은 몽골로 쫓겨 갔을 것이다.
아, 통탄스럽도다! 과거에 오잠(吳潛)과 류청신(柳淸臣)같은 간신배가 떠들어댄 사악한 말이 은밀히 백귀(百鬼)와 더불어 야행하여 고구려의 역신인 남생(男生)과 발기(發岐)의 역심(逆心)과 상응하여 합세하였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도와 그릇이 함께 없어지고 형체와 혼이 다 사라지는 때에 어찌하여 자신만 편안코자 한단 말인가!
금일에 외인(몽골인)이 정사를 간섭함이 갈수록 심하여 왕위에 물러나고 다시 오름을 저희들 멋대로 조종하되, 우리 대신들이 한갓 속수무책인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라에 역사가 없고, 형체가 혼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로다.
대신(大臣) 한 사람의 능력으로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온 나라 사람이 나라 구하기를 스스로 기약하고 나라를 구하는 데 무엇이 유익한 것인지 찾아낸 연후에 비로소 구국을 말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나라를 구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앞에서 말한 바, ‘나라에 역사가 있고, 형체에 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시에 나라를 연 이후로 국통이 있어, 나라는 이 국통으로 인하여 세워지고, 백성은 이 국통으로 인해 흥하였나니, 역사를 배움이 어찌 소중하지 않으리오? 이 글을 써서 기쁜 마음으로 『단군세기』의 서문으로 삼는다. 공민왕 12년 계묘 10월 3일에, 홍행촌수(紅杏村叟)가 강화도의 행운당에서 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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