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고성신문 | | # 내년이면 고희이신데 아직까지 사업체도 운영하시고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시는 일과 건강 비결 등을 부탁 드립니다.
(재)금성장학재단 이사장직과 몇가지 일을 하고 있지만 서서히 정리하고 있습니다. 늦어도 내년까지는 주변정리를 해서 애들에게 넘겨줄 것은 넘겨주고 좀 쉴려고 합니다. 건강비결을 물어셨는데 무슨 비결이 있겠습니까? 어릴 때 배고파서 먹었던 월평리 뒷산의 산나물과 고성 앞바다 어패류. 해초류, 들에서 나는 풀. 야채 등이 자연 그대로의 보약이라서인지 크게 아픈 곳 없이 지냈지만, 이젠 나이라고 먹어서인지 자신할 수가 없네요! 술 한잔 거나하게 마시고 싶어도 다음날이 걱정되고요 하하! 그냥 지금 이대로만 유지해도 좋겠다는 생각인데 그것도 욕심이겠지요.
# (재)금성장학재단의 설립 배경 등을 부탁드립니다.
장학재단은 아버지께서 서울시교육청 제1-378호 인가를 받아 1990년 설립한 것입니다. 1991년부터 장학금을 지급했으니까 벌써 24년 되었네요 엊그제 같은데! 참 세월 빠릅니다. 아버지께서는 일제치하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시대의 사람입니다. 큰 돈이 있어서가 아니라, 가난해서, 없어서 배우지 못한 가슴 속 응어리를 장학재단을 만들어 고향의 어려운 학생들에게 희망을 주고, 배움의 기회를 주는 것으로 대신한 것이지요. 공부는 잘하는데도 돈이 없어 학업을 포기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작으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시작했는데 그 학생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지도 못하시고 이듬해인 1992년 돌아가셨습니다.
# 2대 이사장으로 22년동안 재단을 이끌고 계시는데 재단의 현황은 어떻습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뜻을 받들어 1992년 이사장직을 물려 받았습니다만, 당시에는 운영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은행금리도 높아 수익도 괜찮았고, 장학금 주는 학생도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등록금도 비싸지 않아 큰 부담없이 학생들도 많은 도움이 되도록 지급할 수 있었죠. 그런데 해가 갈수록 장학생은 늘어나고, 등록금도 계속 오르는데, 재단수입은 저금리로 줄어 들다보니 학생들에게 제대로 도움이 되는 장학금을 지급하기 어려운 것이 항상 걱정이고 미안한 마음입니다.
올해로 24년이 되었습니다만 최소 100년은 가는 장학재단이었으면 하는데 차기 이사장에게 큰 짐이 되겠지요 하하. 수차례 기금을 증액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고, 고향사랑으로 평소 장학사업에 관심 있으신 분들을 임원으로 모셔 함께 협력하면 어떨까도 생각하는데 마음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언제라도 동참하고자 하시는 분이 계시면 진심으로 대환영합니다.
4, 5년전부터는 개인적으로 추가 충당하다가 금년에는 에너원(주)이라는 회사에서 2천만원을 지원 받았습니다. 큰 힘이 되었죠. 앞으로도 계속 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 에너원(주)은 자제분이 운영하는 회사 아닌가요?
제 아들이 대표이사로 있습니다. 아들이 최대주주이고 운영하는 회사지요. 2007년에 설립한 신재생에너지부분 벤처 법인기업으로, 작년에는 산업자원부장관상과 국무총리 표창도 받는 등 안정되게 성장하여 재단에 2천만원의 장학금을 보태주니 고마운거죠, 계속 성장해 나갈 것을 기대하며 집안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 지금은 고성군에도 많은 장학재단이 있습니다만, 금성장학재단만의 특징이나 이사장님의 바램이 있으시다면
다행히 고향에 많은 장학재단이 운영되고 있는 것은 정말 반갑고 고마운 일입니다. 학생들이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는 일이 없도록 더 많은 장학회가 설립되었으면 합니다. 저희 금성장학재단은 경남항공고, 고성고, 고성중앙고, 철성고 등 4개 학교에서 신입생 때 장학생을 선발합니다. 선발된 장학생은 재단의 평가기준에 부합하면 대학 졸업 때까지 장학금을 계속 지급합니다.
중간에 군 입대 등 공백이 있어도 대학 4년간의 장학금은 계속 지급 되는거죠. 지금까지 24년간 연인원 520여명에게 6억5천여만원의 장학급을 지급했습니다.
바람이 있다면 저희 금성장학재단 수혜학생이 올곧게 성장하여 사회의 기둥이 되고, 고향을 사랑하고 후배들을 위해 재능을 나눌 수 있는 “아! 역시 금성장학재단 장학생이구나” 라는 말을 듣는 것이지요.
# 고향은 언제 떠나셨고 사회생활은 어떠하셨는지요?
고성을 떠나 상경한 것이 내 나이 24살때였던 1969년이었습니다. 그 당시 친구들은 고등학교 마치면 거의 서울 등으로 떠나가곤 했는데 저는 좀 늦은 편이었죠. 이 일 저 일 하다가 1974년도에 일진포장이라는 사업을 시작했는데 만만치가 않더군요, 결국 1982년도에 사업을 접고 공장은 임대로 돌리고, 자전거 수입판매 등 이것저것 하다 보니 세월이 이렇게 흘렀네요. 돌이켜 보면 딱히 한 일도 별로 없는 것 같이 바쁘게만 살았던 것 같습니다. 이제 주변 정리하고 나면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들과의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싶습니다. 그리고 많은 도움을 주신 고향 선후배님과 어울리는 자리도 자주 만들고, 태어나 자란 고향 고성을 좀 더 자주 찾아 소원했던 친구들과 어린 시절, 학창시절 이야기에 밤을 새우고도 싶고요. 특히 고성읍 월평리 고향 친구들과 전어회 썰어놓고 소주 한 잔 나누는 시간도 빨리 갖고 싶습니다. 전부 노는 이야기인가요 하하.
# 고성읍 월평리 매수마을에 경로당 건립과 어린이 놀이터 설치를 지원하는 등 고향마을에 애정이 많은 걸로 압니다
어머니는 제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아무런 기억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가 ‘조센징’이라는 모진 인종차별과 학대를 견디면서도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어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1946년 해방 이듬해에 태어나, 5살때 6.25를 겪었으니 그 시절 누군들 힘들지 않았겠습니까만,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마저 일본으로 떠나고 없는 사실상 고아나 다름없이 자랐으니 얼마나 춥고 배고프고 외롭고 정이 그리웠겠습니까? 그럴때 나를 먹여주고 안아주고 정을 주신 분들이 고향 매수마을 어르신들이었습니다. 그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어렵게 모은 돈으로 토목회사를 차리고, 다행히 사업이 좀 풀리다 보니 제일 먼저 매수마을 어르신들을 위한 경로당과 어린이 놀이터를 짓고, 소를 잡아 경로잔치도 해 드린 것은 나의 마음이기도 했지만, 고아나 다름없는 자식을 보듬어 준 고향 분들에 대한 아버지의 작은 보답이기도 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께서 고향마을에 자그마한 흔적이라도 남기고 가신 것은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제가 고희를 바라보고 있네요. 그때 아저씨, 형이라 부르던 분들도 지금은 세상을 많이 떠나시고 몇 분 안 계십니다.
# 모교 동문회장도 역임하고 지금은 향우회 자문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동문회나 향우회를 바라보는 이사장님의 생각과 바람이 있다면?
10여년 전에 재경고중동문회 회장을, 5년 전에는 철성초 총동문회 회장, 3년 전에는 경남항공고 총동문회 회장을 하기는 했지만 하고 싶어서 했다기 보다 주변 선후배님들에 떠밀려 했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사는 곳이 서울이다 보니 각종 행사에 참석도 자주 못하고 해서 지금도 미안한 마음입니다. 다행히 동기들과 선후배님들의 도움으로 임기는 마칠 수 있어서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립니다. 재경향우회 자문으로 있습니다만, 할 일은 별로 없습니다. 심의표 회장을 중심으로 워낙 잘하고 계시기 때문에, 참석하라면 꼬박 꼬박 참석만 하면 됩니다. 천리먼길 한양에서 고향사람끼리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지금의 재경향우회가 있기까지 한갑진 회장으로부터 고인이 되신 이근호 회장까지 많은 분들의 노고와 희생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앞장서서 일하는 분들의 헌신적 봉사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담도 나눠 갖고 같이 어울리는 향우회와 동문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 경남항공고 회장 재임시 ‘동문회명부’를 발간하였고, 재경고중 명예회장 재임시에는 ‘고중사나이’라는 동문회지를 발간했습니다. 소감을 부탁 드립니다.
1935년 개교 이래 처음으로 1회부터 72회까지 9천여 동문의 근황을 수록한 ‘동문회명부’를 발간한 것은 경남항공고의 자랑이자 스스로도 자찬하고 싶은 큰 업적입니다. 전대의 김성준, 박복동 회장님께서 학적부 발췌작업 등 어느 정도 자료를 정리를 해 놓으셨고, 한문으로 기재된 학적부를 경상대 한문학과에 의뢰하여 번역하는 등 헌신적 노력을 해 주신 이판권, 조경대 부회장님과 서정석. 허종철, 양주동, 이갑렬 위원 등 많은동문들이 함께 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고성중학교 동문회지 ‘고중사나이’는 박수안 총동문회장의 작품입니다. 저는 편집발간 작업을 서울에서 하다 보니, 명예추진위원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었는데 발간일자는 다가오는데 동문들의 협조는 미진하고 하여 재경지역 동문들을 서울 근교에 있는 산장으로 초대하여 원고 제출 등 협조를 당부하고 편집, 교정 발간 등으로 고생하는 편집위원들에게 가끔 식사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제가 한 일이지요. 밥 값이다 술 값이다 해서 돈은 좀 들었지만 약속한 기일 전에 ‘고중사나이’가 발간되어 뿌듯합니다. 60여년만에 처음으로 동문들의 글을 모아 500여 페이지의 회지를 창간한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박수안 회장의 추진력과 열정에 감사하며, 서병진 고문님과 박진광 편집장 등 많은 동문들의 노고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 가족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1972년 그러니까 서울에 올라온 지 3년만인 27살에 천사같이 어여쁜 김해 아가씨와 결혼을 해서 1남 2녀를 두고 있습니다. 큰 녀석이 아들인데 앞서 언급했듯이 에너원(주)이라는 벤처기업을 운영하고 있고요, 두 딸은 나에게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자식으로 회사 일을 도우기도 하며 본인들의 나아갈 길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고성신문 추석특집에 훌륭하신 선후배님들이 많이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저를 인터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성신문의 발전을 기원 드리며, 고향소식, 향우들 소식 많이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희망이 있는 고향의 모습을 전해듣고 싶군요. 이번 폭우로 피해를 보신 분들께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가족들과 함께 뜻깊은 추석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