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딸도 하나 없는 5형제 중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딸이 없다 보니 어머니 혼자 밥 지으랴, 농사 지으랴, 생계 꾸려가랴 어머니는 늘 바빴다.
논 마지기에 종중 시사답 200평으로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술도 팔고 까자도 파는, 요즘으로 치면 구멍가게인 조그만 점빵을 운영하였다. 늘 바쁜 어머니를 위해서 한 사람 정도는 딸 노릇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어머니를 도왔다. 어머니 일을 도우면서 지금도 가슴 짠하게 가장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물건이 하나 있다. 어머니의 기멍통이다.
필자가 삼동에 날이 희붐하게 새기도 전에 일찍 일어나 정기를 향한다. 제일 먼저 헛간에 가서 짚소꾸리와 잿당그래를 들고 와서 재를 쳐내면 어머니는 갈비로 불을 지피고 밥솥에 기멍물을 데판다. 추운 삼동이라 청에 있는 청걸레가 얼어서 장작이 되고 심지어 청에 있는 요강의 오줌이며 정말로 추운 날에는 구시까지도 얼기도 했었다.
고무장갑도 없던 시절이라 밥을 하기 전에는 반드시 이 기멍물을 데파야 했다. 그래야 설거지를 할 수가 있었고 밥 지을 쌀도 씻을 수가 있었다.
요즘은 기멍통을 대신할 플라스틱 그릇 종류들이 많이 나오지만 필자의 어린 시절에는 그런 것들이 없었다. 소나무 조각을 모아 붙여 다라이처럼 둥글게 만들고 나무로 테를 둘러 붙인 나무 기멍통이 전부였다.
어머니는 쌔끌 밑에 걸어둔 쌂은 보오쌀을 손으로 떠서 먼저 솥에 안치고 그 욱에 한 줌의 쌀을 안친다.
나는 고오매가 든 가마니나 자리쪽으로 가서 고오매를 너덧 개 가져와서 부석에 넣고 불을 땐다. 밥이 끓고 나면 조금 있다가 재진불을 넣는다. 밥이 다 잦혀지면 어머니는 밥을 푼다.
어머니가 소더방을 여는 순간 구수한 밥맛이 코를 즐겁게 한다. 그 즐거움도 잠깐, 어머니는 아부지의 밥을 먼저 푸는데 아버지의 밥에는 쌀밥이 3/4정도 되고 보리밥이 1/4정도 되게 푸지만 우리의 밥은 아버지와 정반대로 밥의 3/4이 보리다.
그렇다고 늘 보리밥만 먹는 것은 아니었다.
시골에 살던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랬듯이 특별히 기다려지는 날이 있었다.
그날이 바로 제사나 생일이다.
전에는 제사나 생일 등 집안의 특별한 행사가 아니면 쌀밥 구경하기가 몹시도 어려웠다.
그래서 가까운 친척이나 이우지에 지사라도 있는 날이면 이른 새복에 제사 임석이 오기를 잠까지 설쳐가면서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살팍에서 제삿밥 가져왔다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눈과 귀가 번쩍한다. 그렇게 먹고 싶었던 쌀밥이며 꽂감에 시리떡까지…. 쳐다만 보아도 눈이 즐거웠다. 꽂감에다 시리떡은 참으로 꿀맛 그 이상이었고 엄마가 비벼주는 제삿밥에 찐 생선을 입에 넣으면 그 맛은 천하의 일품이었다. 이 맛을 흉내낸 음식이 바로 안동의 유명한 헛제삿밥이라 하지 않던가?
얼마 전에 큰집에 할배 지사라서 고향을 다녀왔다.
내가 살던 고향집도 얼마 전 허물고 밭을 만들었다. 주위에 살았던 동네 아제들과 아지미들은 대부분 저 세상의 객이 되었다. 살던 그 자리는 다 폐허가 되어 지슴으로 무성하거나 밭이 되어 있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시끌벅적 아이들로 넘쳐나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던 정든 고향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다.
옴마와 아부지가 씨고 내가 썼던 정든 고향 사투리를 떠 올려 본다. 시사, 짚소꾸리, 기멍통, 잿당그래, 쌔끌, 보오쌀, 소더방….
아, 고향이 보인다. 사투리 속에 아득히 사라져가던 내 고향이 보인다.
<사투리 풀이 도움말>
•시사답-시사(시제)를 지내는 사람에게 부치라고 준 논이나 밭
•점빵-점방(가게)
•기멍통-개수통(설거지통)
•삼동三冬(겨울철의 석 달)
•정기-부엌
•짚소꾸리-삼태기
•잿당그래-고무래
•갈비-솔가리(말라서 땅에 떨어져 수북이 쌓인 솔잎. 주로 불쏘시개로 쓰인다)
•기멍물-개숫물(설거지할 때 그릇을 씻는 물)
•청걸레(일반적으로 걸레를 ‘청=마루’에 많이 둔다고 해서 청걸레란 방언을 썼음)
•구시-뒷간(변소)
•쌔끌-처마(서까래)
•보오쌀-보리쌀
•재진불-잦힌불(밥이 끓인 후 잠시 불을 물렸다가 밥을 잦히려고 두 번째 잠깐 넣는 불)
•소더방-소댕(솥뚜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