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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16좌 세계 최초 등반 엄홍길 대장

인터뷰 엄홍길 재경고성향우
윤동수서울지사장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4년 03월 24일
ⓒ 고성신문
서울시 중구 장충동에 있는 자그마한 엄홍길 휴먼재단 사무실에서 고성이 낳은 세계적 산악인 엄홍길 대장을 만났다.


#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천 고봉을 16좌

등정했는데 처음부터 계획했습니까?


히말라야는 오르고 싶다고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잊고 히말라야가 허락해야 오를 수 있는 거죠,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꿈은 가지겠지만.
히말라야를 1986년부터 도전해서 1988년 세 번째만에 에베레스트를 성공하고, 2007년 로체샤르를 마지막으로 27살부터 48살까지 22년동안 38번을 도전해서 20번 성공한 끝에 세계최초 16좌 등정이라는 분에 넘치는 영광도 안게된 것이죠.


# 왜 악산인 그것도 히말라야라는 험난한 길을 선택하신 겁니까?


태어나서 자란 곳이 전부 산이었습니다. 고성군 영현면 봉발리도 첩첩산중이었고, 세 살때 이사한 의정부 집도 도봉산 골짜기였으니까요. 가끔 부모님 원망도 했지만 그냥 운명처럼 산이 마당이고 놀이터고 운동장인 셈이였죠. 초등학교까지 30여분 산을 내려가야 하는데 학교 근처에 사는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고등학교 다닐 때 고상돈 선배님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했고. 신문 1면에 정상에서 태극기 들고, 산소마스크에 다운자켓 배낭메고 큰 무전기 들고 있는 늠름한 모습을 보는 순간 운명처럼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나도 에베레스트 한 번 올라가 보자는 막연한 꿈을 가졌고 그 꿈이 성공하기까지는 11년이나 걸렸던 거죠.


내 고향은 경남 고성 영현 봉발리입니다


# 고향이 고성이라지만 세 살때 의정부로 이사갔으니까 무늬만 고성 아닌가요?


제가 세 살때 생각이 날 정도로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요(후후) 하지만 고등학교 때까지는 명절이면 한 번도 빠짐없이 기차 타고 버스 타고 고성에 갔습니다. 지금은 4시간이면 충분하지만 그 때는 참 멀기도 엄청시리 먼길이었죠. 그것뿐이면 다행이죠, 차례 모시자마자 삼산면 장치리 삼거리 코너에 있는 외가까지 또 걸어갑니다. 아버지 어머니 누나랑 보따리 들고 이고 상리 부포사거리 지나 재에 올라서면 눈 앞에 펼쳐지는 잔잔한 호수같은 고성바다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지금도 가끔 꿈을 꾸기도 합니다. 그 때부터는 내리막길이죠, 냅다 뛰어가면 그렇게 반겨주시던 할아버지 할머니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대나무가 많았고 곶감도 참 맛있었는데…. 그 후론 명절 때마다는 못 갔지만 히말라야 갔다 오거나 최소 1년에 두 세번은 아버님도 계시는 선산도 찾고 집안 어른도 뵙고 외가 동네도 찾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강연이나 행사에서 본인 소개를 할 때면 서두에 “내 고향은 경남 고성 영현입니다”라고 하게 되더군요.


아! 안나푸르나


# 무늬만 고성이라는 질문은 사과드립니다(웃음) 16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요?


38번 갔다가 20번 성공했으니 50% 조금 넘는가요? 어디 한 곳 소홀히 대할 수 없지만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안나푸르나입니다. 네 번 실패하고 다섯 번째 성공하기도 했지만 동료를 셋이나 잃었으니까요.
세 번째 등정 때 해발 5천500미터 지점에서 30여미터 앞에 가던 셰르파가 순간 눈 앞에서 사라지는데! 크레파스에 빠진거죠. 그 전에도 수십 번 오르내리던 길이었는데….
히말라야를 같이 두 번 성공했고 한국에도 초청하고, 가족같이 지내던 친구 같은 셰르파의 주검을 수습하고 하산할 때의 처참한 심경은 아마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네 번째는 정상을 바로 눈 앞에 두고 앞서가던 셰르파가 추락하는데 순간 살려야한다는 본능에 셰르파와 연결된 로프를 잡는 순간 20여미터 같이 추락한거죠.
오른쪽 다리뼈가 산산조각나고 그런 상태로 2박3일 동안 왼발 하나로 암벽 빙벽 타면서 내려오니 다시는 산에 갈 수 없다는 의사 진단에 정말 깊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철심박고 두어달 지나 깁스 푸니까 다리가 삐쩍 말라 있더군요, 무릎도 안 굽혀지고요.
5개월만인가 스틱 짚고 다리 질질 끌면서 백운산에 올라 목 놓아 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10개월 후에 다섯 번째 안나푸르나를 찾았고 마침내 성공했던 것입니다.


엄홍길 휴먼재단


# 지금은 히말라야를 떠나 엄홍길휴먼재단에 전념하는데 이유라도 있나요?


사람들은 경험이 많으면 산에 오르기 쉬울 것이라고 하지만 히말라야라는 곳은 오르면 오를수록 몸서리쳐지게 무섭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첨단문명이 어쩌고 해도 산이 허락하지 않으면 결코 오를 수 없는것이 히말라야입니다.
한동안은 오직 눈 덮힌 정상만 바라보았고 성공하든 실패하든 하산해서는 돌아오기 바빴습니다. 수억원에 달하는 비용과 대원구성 등 다음 등정계획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던 것이죠. 죽음의 순간에 부딪치면 살아만 돌아가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고, 그렇게 등정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산 허리가 보이고 숲도 보이고 산 아래 모여 사는 그동안 나를 도와준 고마운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2007년 로체샤르 등정을 앞두고 16좌 등정을 성공하면 덤으로 얻은 남은 나의 인생을 그동안 함께 했던 히말라야 친구들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다행히 성공했고 히말라야에 많이 부족한 교육과 의료사업에 뜻을 두고 재단 설립을 추진했던 것입니다.


# 엄홍길휴먼재단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순탄하셨나요?


제가 너무 순진한 것인지, 세상물정을 몰랐던 것인지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학교 하나에 2, 3억 드는데, 마음은 급하고, 그렇게 미친듯 뛰어다니는데 뜻밖에도 2007년 말에 파라다이스 그룹에서 특별공로상과 4천만원이나 되는 상금을 주더군요,
공로상보다 4천만원이라는 상금이 얼마나 고마웠던지(하하) 그 돈을 종자돈으로 그동안 저를 믿고 아껴주시던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2008년 5월 28일 엄홍길휴먼재단을 설립하였고, 2010년 5월 5일 해발 4천60m 팡보체학교 개교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타르푸, 룸비니, 카스키에 학교를 개교를 하였고, 3월 말이면 다딩 등 4곳이 개교하고 두 곳은 공사 중입니다.
국가로부터 대한민국 체육인 최고의 훈장인 청룡장까지 받았습니다,
이젠 히말라야 17좌를 오른다는 심정으로 휴먼재단을 통해 나눔의 삶을 살아가려 합니다. 16개 학교가 개교할 때까지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합니다. 가톨릭중앙의료원 등 국내 몇몇 종합병원의 아름다운 협조를 받아 의료사업도 하고 있습니다.


# 첫 번째 학교를 팡보채마을에 설립한 이유라도 있나요?


재단의 첫 번째 학교이니 그 규모보다 상징성이 중요하더군요. 처음 등정하고 성공한 곳이 그리고 처음 셰르파를 잃었던 곳도 에베레스트입니다.
1986년도 등반 중 동료 셰르파가 천여m 절벽으로 추락했고 아직도 그 주검을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그 친구 고향이 팡보채라는 마을이죠. 그래서 1호학교를 그곳에 지은 것입니다.


# 고성에 있는 엄홍길 기념관이 예산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고성은 최고의 인재를 배출한 고장입니다. 이런 자랑스러운 고향에 제 이름의 기념관이 있다는 것 이상의 영광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한때 예산문제로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아프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저 자신이 너무 무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좀 더 자주 고향을 찾고 고향분들과 어우러져 많은 교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념관 주변에 캠핑장과 거류산 둘레길이 조성된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주변이 아름답게 변하면서 많은 사람이 찾는 기념관이 되도록 저부터 앞장서겠습니다.


# 재경고성향우회 임원으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휴먼재단이 필요한 재원을 모금하려면 불러주던 안 불러주던 이곳 저곳 참 많이도 돌아다닙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경남지역 향우회도 자주 가게 되는데 하나같이 저희 고성군향우회를 부러워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 때마다 내가 고성인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해지고 자랑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향우회가 되기까지는 많은 분들의 아무 조건없는 봉사와 자기희생의 결과일 것입니다. 깊은 감사와 존경을 드리며 아직까지는 여러 가지로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여 참여하고 협조하도록 하겠습니다. 올 여름방학 때 자녀들 고성방문을 추진하신다고 들었는데 제 자식도 꼭 참여시키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씀은?


대체적으로 산악인들은 경제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휴먼재단에서는 히말라야 교육·의료사업과 별도로 국내 산악인 유가족에게 학자금 지원등을 하고는 있습니다만 아직은 재단 여건이 어렵다 보니 많이 부족합니다. 더 열심히 뛰어서 좀 더 많은 지원을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는 누가 뭐래도 고성 사람입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재경 향우님들은 물론이고 고향 고성 어르신들과 후배님들과도 자주 어우러지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자주 함께 못한 점 헤아려 주시고 건강하십시오.


좁은 공간 자그마한 철재책상에 허름한 탁자 하나, 벽에 걸린 표구되지 않은 사진 몇 장! 종이컵 커피 한 잔의 사무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인물 엄홍길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으면서 엄홍길휴먼재단과는 너무나도 어울리는 공간에서의 두시간이었다. 엄홍길 휴먼재단 카페주소 www.uhf.co.kr

윤동수서울지사장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4년 0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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