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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고성신문 | | 고성군에 새로운 문화 예술 공간을 마련한 김숙선 대표. 시조문화의 저변 확대와 고성 아이들의 문학 사랑을 고민하는 그녀는 늘봄예술촌을 세웠다. 그녀를 만나 늘봄예술촌 조성과 시조 백일장을 열어 시조문화 확산과 고성문화발전을 추진하고 있는 김 대표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늘봄예술촌은 고성읍 신월리에 2천600㎡로 세워졌다. 1월 임시 개장을 하고 개촌식은 봄 즈음에 할 계획이라 한다. 시비, 공방, 갤러리, 모시꽃 재능기부 체험교실 등으로 구성되어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이 될 예정이다.
그녀는 늘봄예술촌이 문학관으로 국한되지 않고 문화 예술인들이 함께하는 예술촌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이름도 예술촌으로 지었다. 김 대표의 꿈은 예술촌이 그녀의 삶에서 끝나지 않고 고성에서 더 긴 시간 이어지기를 바란다.
김숙선 대표의 문학적 시발점은 어릴 적 언니의 죽음으로 신월리 바닷가에서 화장을 하는데, 그 꽃불이 하늘 끝에 닿고 그믐밤이라 가득찬 바다를 채워 그 북받치는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다 한다. 그녀는 그 때의 감수성이 지금의 시인으로서의 시작이었다 한다.
그녀는 2005년 ‘보길도에서-고산의 숨소리’로 문단에 등단하며 2010년 ‘그리움의 창’이라는 시집을 냈다. 같은 해 고성소가야시조문학회 창간호를 냈고 문학회 회장을 할 때 고성군 최초로 서울 도봉산, 내장산, 고성 남산에서 시화전을 열었다.
“재능 기부란 것에 대한 의미를 처음에는 몰랐다. 그러나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런 것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김 대표의 집안은 나름 풍요로운 집안이었는데 중학교 2학년 때 중퇴를 했다. 남아선호사상 때문이었다. 그녀가 살던 마을에는 초등학교 문턱도 밟지 못한 아이들이 13명 정도 있었다. 잘 살던 환경으로 집에 있던 흑판으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오빠들의 몽당연필과 쓰다 남은 공책으로 국어와 산수를 가르쳤다.
“또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생각했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노동일을 하든 쓰고 셈은 해야 된다 생각했다.”
배움에 목말랐던 그녀는 어릴적 성공하여 50세가 되면 모교에 장학금을 내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녀는 48세 되던 때 익명으로 장학금을 기탁하고 20여년간 계속 되어 왔다.
김숙선 대표는 지난 11월에는 고성군 초등학생들의 문학적 소양을 높이고 시조능력 배양을 위한 ‘제1회 늘봄예술촌 시조문학상 학생백일장’ 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백일장에는 고성초등학교, 대성초등학교, 철성초등학교, 사천 동성초등학교 학생 120여명이 참가했다.
“요즘 시조가 자꾸 뒤안길로 미뤄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일본의 하이쿠는 세계적으로 알려진데 반해 조상의 얼이 담겨 있는 시조가 학생들을 비롯한 군민들이 잘 모르고 향유하지 못하고 있다.”
김 대표는 시조가 3장 6구 12음보라는 틀 속에서 함축과 절제의 문학으로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예술 장르라고 이야기한다. 김 대표는 시조를 어릴 적부터 접하고 써 봄으로써 성인이 되어서도 시조의 아름다움과 멋을 느끼게 된다고 생각한다.
행사를 준비하며 학생들의 참가가 저조할까 걱정도 많이 했다. 일일이 학교를 찾아 다니며 많은 참여를 부탁했다.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우걸 이사장이 행사에 참석해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고성군 시조의 발전과 활성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했다. 많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 주어 잘 치를 수 있었다. 고성군의 시조시인들이 중앙에서 큰 활약을 하고 있는데 늘봄예술촌 시조문학상 학생백일장 대회는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문학과 시조의 씨를 뿌리는 자리이다.”
그녀는 고성문화원에서 모시꽃 강의를 통해 받은 수당 전액과 개인 사비를 들여 백일장을 개최해 재능기부의 아름다운 모범이 되고 있다. 김 대표는 시조문학이 점차 잊혀져가고 있는 가운데 고성에 ‘우리 얼’의 씨앗을 뿌려 ‘문학 고성’이라는 밭을 일구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