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고성신문 | |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23전 23승을 거뒀다는 주장은 실체가 없이 대략적인 셈으로 표현한 횟수이다.
지난 2004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방영을 전후해 ‘23전 23승’이라는 문구가 각종 매체에 이순신의 전적으로 사용됐지만 이러한 주장은 구체적인 해전명칭을 제시하지 않고 대략적인 횟수만 카운트했기 때문에 어떤 해전들로 구성돼 있는지 알 수 없다. 임진왜란의 대표해전은 총 21회로 이 중 이순신은 총 17회 대표해전에 참가해 전승했고 세부해전 49회 중 이순신은 45회 참가해 전승(총 62전승)을 거뒀다.
이순신이 치른 수많은 해전 가운데 1차해전에 포함되어 있지만 당항포해전보다 각광을 덜 받은 적진포해전에 대해 살펴본다.
임진왜란 당시 옥포해전, 합포해전과 함께 흔히 1차해전에 포함되는 적진포해전은 그 지역이 오리무중이었다. 이희승, 조성도 선생이 밝힌 기존의 위치는 통영시 광도면 적덕리였지만 2006년경 고성지역에선 향토사학자를 중심으로 당동리 또는 신용리로 발표를 하였다.
하지만 기존 사학계에선 동해면 적포만이 적진포를 포함한 해역이라고 공표하고 있었고, 땅이름 대사전에서도 동해면 내산리 일대라고 표기를 하고 있다.
이처럼 사학계의 보편적 인식과 달리하는 보수재야사학의 발전을 위하여 정부, 자치단체의 정책개발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강단사학자들이 올바른 의견을 내놓은 경우라도 재야지역사학자들이 자꾸 선행연구를 뒤집는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있다.
첫째, 남촌진이 적진포라면 왜군은 종 9품 별장과 군사가 지키고 있는 이 곳을 굳이 공격했을까.
둘째, 대동지지에 따르면 적진포 30리, 적진향 20리로 표기. 적진포는 고려시대의 적전포.
셋째, 한자 표기상 쌓을 적자와 붉은 적자 사이에는 분명 간극이 존재하고 이순신도 지명표기의 중요성을 알았을 것이다. 난중일기의 표현인 적진포를 ‘저도를 지나 고성의 경계에 있는 적진포’라고 분명히 밝힌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정진술 교수는 적진포 해전지가 동해면 내산리라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이다.
한국방송통신대학의 송찬섭교수는 “사료의 정황상 전도마을의 적포가 맞는 것 같은데, 정황이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아침 일찍 남포에서 출발해서 해전을 마치고 아침을 먹을 수 있는 거리, 즉 마산만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이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당시 창원 땅과 고성 땅의 경계라고 한 부분이다. 당시 경계는 지금의 당항포 내만 지역이므로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일 경우 적포가 맞다”고 밝히고 있다.
통영의 오곡도에서 거주하면서 임진왜란 해전사를 연구하는 이봉수씨는 적진포의 위치에 대해 종래에는 고성군 거류면 당동리의 포구로 보았지만 동해면 내산리 적포로 견해를 수정할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또한 참여정부 당시 해양수산부에서 발간한 <한국의 해양문화>라는 책에서 적진포해전지가 동해면 내산리라고 표기한 부분을 찾을 수 있다.
1619년(광해군 11년)에야 남촌진이 거류면 화당리에 설치되어 문헌 기록은 적진포에 관한 비정의 개연성이 없으며 선조 당시의 포구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내산리 고분군과 가까운 동해면 덕곡 삼거리 일대가 보배, 보물이 쌓여있는 포구의 뜻인 적진포(赤珍浦, 積珍浦)가 더 개연성이 짙다고 할 수 있고 더군다나 고산자 김정호의 동여도에 보이는 ‘시락도’는 마산 진전면 시락리로 보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