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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명사록이 편찬되기까지 많은 역경이 있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묵묵히 고성문화발전에 기여 온 숨은 공로자 황종래 고성문화원 전 사무국장.
그는 고성군민을 위해 젊은 세월과 가정까지 뒷전에 두고 고성문화유적지, 고성명사선비 학자들의 시집, 고성향토지명사, 고성명사록 등 후세에 물려줄 책 발간에 힘써왔다.
또한 사라져 가는 전통상여 어울림 소리를 고성군대표로 경남도 문화예술 경연대회에 출전케 하고 청백한 김정실 제2대 국회의원 업적을 1년 여에 걸쳐 자료를 수집하여 경남인물지에 등재케 하는데 큰 역할을 해왔다. 특히 근간에 배분되고 있는 고성명사록은 그가 없었다면 발간조차도 어려웠을 만큼 황 사무국장의 열성으로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고성명사록은 2009년 6월에 고성명사록 편찬의 방대한 사업에 착수, 군에서 사업타당성을 인정하여 2010년 군비를 지원받아 3년 10개월이 넘는 기간에 걸쳐 발간됐다. 그동안에 황 사무국장은 대가 없는 무보수로 사비까지 써가면서 책 발간을 위해 노력해왔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가 고성명사록을 편찬한 계기는 한마디로 답변하기 어렵다고 한다.
황 사무국장은 “고성은 산자수려 한 고장으로 정기를 타고나 옛 부터 ‘선비의 고장, 충렬의 고장, 인물의 고장’이라 했다”며 산업화사회로 서구문화가 범람하여 유서 깊은 전통문화와 예의범절이 오악에 물들어 역사적이나 문화적으로 우리 고을을 빛낸 분들의 행적이 잊혀져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왔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고성문화원사무국장을 15년 동안 역임하면서 보고 듣고 절실히 느낀바가 있어 우리고장출신들의 행적을 재현하여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하고자 고성명사록을 편찬하게 됐다”고 밝혔다. 편찬하는 과정에서도 자료를 수집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황종래 사무국장은 “고난을 각오하고 260여곳의 마을이장들에게 충분한 설명으로 마을방송 등의 협조요청을 했다”며 하지만 일부 이장들의 협조가 없어 자료수집이 예상외로 지연되었다고 말했다. 이에 황 사무국장은 보다 신속을 기하고자 각 마을의 성씨와 문중별 종회장이 누구인지 알아내고 직접 집을 찾아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안 간에 사이가 좋지 않은 문중에는 주소도 전화도 아예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존심을 버리고 4~5차례 전화 또는 면담을 통해 소속을 알아내는데 좋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황종래 사무국장은 저명한 인사들의 한계선을 가려내는데 숫한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일간에서는 ‘사무관이 무슨 명사냐? 우리고성군민의 위신문제다’라고 하면서 명사록 명칭에 대하여 일부인사들이 이의를 제기 하는 분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고성명사록은 한국인의 명사가 아니고 우리고성인의 명사로써 편찬위원 전원이 만장일치로 고성명사록이라고 명명하게 된 것이다. 그는 “고위직에 있던 일부인사들은 사무관들과 같이 등재하는 것을 원치 안아 신청이 극히 저조하여 그 개념을 해소시키는데 힘이 들었다”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또 “한사람을 등재하고자 직접적이나 간접적으로 전화 또는 면접을 해야 했고 이러한 노력 끝에 천여명의 인사들이 이 책에 올리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고성명사록 편찬이전에도 고성문화유적지라는 책을 편찬하기 위해 각고한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황 사무국장은 군비예산은커녕 맨발로 1987년에 책 편찬작업에 착수하여 1990년에 책을 출간했다. 출간에 드는 인쇄비와 번역료 등은 출향인사들에게 도움을 받아 해결했다. 책 내용은 군내 각 성씨, 문중재실, 효자, 열녀, 비문 등의 원문과 번역문을 실었고 남산공원에 있는 고성을 다녀간 역대 현령 공적비와 행적비 등의 내용이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책의 부록편에 등재했다. 그의 노력은 1991년에 문화부가 신설되면서 빛을 바랐다. 초대 문화부 이어령 장관이 그동안 전국문화원 사업실적을 실물로 보고 하라는 지시에 고성에서는 고성문화유적지를 올렸다.
그 결과 1992년 5월 고성문화원이 시범문화원으로 지정되어 정부로부터 상금 3천650만원을 받는 쾌거를 거뒀다. 이 상금은 현 고성문화원 건립에 드는 비용으로 사용됐으며, 부족한 사업비에 대해서는 황 사무국장이 직접 문화부 관계자들을 만나 8천만원의 사업비를 확보하고 이어령 장관에게 간청하여 8천만원의 사업비를 추가로 확보해 지금의 고성문화원을 건립할 수 었었다고 한다. 이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의 귀중한 업적은 먼 훗날에도 잊혀 지지 않고 후세들에게 기억될 것이라고 본다. 황종래 사무국장은 남이 알던 모르던 장구한 세월에 묵묵히 고성문화발전을 위해 힘써온 한사람으로서 주위사람으로부터 칭송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