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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의 마지막 생존 독립운동가 정덕수 선생 서산에 지다

18일 향년 89세 별세
글=시인,작가정해룡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2년 11월 24일
ⓒ 고성신문

개천면 월곡마을서 태어나


1930년 어머니와 함께 도일


일본 전화제유회사 취직했으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나


 


고성출신의 독립운동가 정덕수(丁德水) 선생께서 지난 18일 향년 89세로 별세했다. 


고성출신으로 유일하게 생존했던 선생이 별세함으로 향토독립운동가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다.


정덕수 선생은 필자의 집안어른이기 때문에 자칫 미화하거나 과장된 글로 인해 고인과 독자에게 행여 누를 끼치지는 않을지 지극히 조심스럽다.


하여 선생의 자필 글과 독립운동사 관련 자료를 참고로 선생의 독립운동활동을 선생의 고향 군민들에게 알리려 한다.


선생은 고성군 개천면의 옥천사 기슭 월곡마을에서 1922년에 태어나시었다.


 


부친은 3세 때 돌아가시고 보통학교 2학년 때인 1930년에 모친과 함께 일본 구주탄광에서 광부로 종사하던 형들을 찾아 도일한다.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공업학교 3년에 편입되어 졸업하고 구주에 있는 전화제유회사 연구실에 시험을 거쳐 취직이 되어 분석실에 근무를 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는 일류학교나 좋은 직장에는 조선인은 일절 못들어 갔는데 선생이 취직된 것은 학교장의 우등생이란 추천서와 입사시험에서 우등이었기 때문이나 결국 일년도 못 돼 조선인이란 이유로 쫒겨나고 만다.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동양공업회사에서 화공(畵工)을 모집하는 것을 알고 응시하여 최고점을 받아 합격통지서가 왔으나 역시 조선인이란 이유로 합격취소를 당한다.


 


당시의 일본사회에서는 조선인을 개나 돼지 취급을 하던 풍조였다.


선생은 이러한 현실의 절벽 앞에서 목을 놓고 운다. 울면서 이를 악물고 각오를 다진다.


“일본인에게 절대로 굴하지 않으리라. 우리끼리 사는 나라를 만들리라. 내 한 몸 바쳐 밑거름이 되리라”고.


그리하여 선생은 구주의 본가와는 소식을 끊고 우리 조선인이 많이 사는 대판을 활동근거지로 삼아 공부가 목적이 아닌 동포의 규합에 나선다.


동지들과 요인살해목적으로 수류탄제조, 폭탄제조를 하여 생구산중에서 실험까지 하며 테러준비 활동을 하던 중 발각되어 사상범으로 법정에 선다.


 


선생은 구속이 되자 구치소에서 검사의 허락으로 모친에게 대학에서 공부 잘 하고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편지를 쓴다.


이상하게 생각한 모친이 편지의 주소를 수소문하여 알아보니 구치소였다.


 


# 일본검찰에 기록된 독립운동개요


 


주모자 정덕수(당시19)는 소화 16 1월 고학의 목적으로 대판에 와서 시내 남구에 소재하는 상도호텔에서 잡역부로 일하는 한편 대판시 유도(酉島)2공업학교에 통학하고 있었던 바 치열한 민족적 편견으로 항상 조선독립을 희구하고 있던차 때마침 관서공업학교 1년생 조성인과 알게 되자 그에게, “히틀러는 노력의 결과 민족의 결합에 성공하여 대독일을 건설하였다. 우리도 또한 조선민족을 결합하여 현재의 피압박 조선민족을 해방하는 조선독립운동에 매진하여야 한다”라고 하면서 독립운동에 참가할 것을 선동하고 마침내 동지로 획득하여 자주 회합하고 민족의식의 고양에 노력하여 오고있던 바 작년 8월 중순경에 정덕수, 강연중 두 사람은 비밀결사조직의 협의를 하고 마침내 당명을 ‘조선독립당’이라고 결정하여 이를 별지와 같이 서약, 당칙(黨則), 기구를 기초 결성하였다. 


 


(중략)


 


대판직물주식회사의 동료 직공에 대하여 조선독립운동을 획책하고 동지 획득에 노력한 결과 선전실, 유촌 장시, 신정 유수, 천도 팔랑, 유전 정휘, 산하 모 등을 획득하여 정덕수가 통할하는 조선독립당에 전원 참가할 것을 맹약하였다.


그리하여 이 조직은 급속도로 확대 강화하게 되었다. 그 결과 직장관계에서는 우유배달집단, 신문배달집단 등의 결성을 보았고 학우관계에서는 유도제2공업학교, 관서공업학교, 대판공업학교 등에 학생집단의 결성을 보게 되었다.


이리하여 소기의 목적달성을 위하여 과감한 운동을 전개하다 검거되었다. 


 


정덕수 선생은 1942 8 31 3년형을 선고받고 해방된 1945 9 6일에 출옥을 했다.


그후 해방된 조국에서 교편과 군속으로 근무를 했으며 서예와 화가(서양화)로 활동을 했다. 


 


참고로 서약과 당칙 강령을 살펴보자.


 


서약


1, 우리는 조선독립을 위하여 조선민족의 행복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다.


2,  우리는 동지 정덕수를 조선독립청년당 당령으로 삼고 그의 지휘를 따른다.


3, 조선독립청년당 당칙은 절대로 이를 준수한다.


 


당칙


1, 당원은 절대로 당령의 명령에 복종한다.


2, 당원은 당령의 허가를 받지 않고 탈당할 수 없다.


3, 당원은 매월 당비 30전을 납부한다.


4, 입당자는 당령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5, 당칙 제1조 및 제2조에 위반하였을 경우에는 엄벌에 처한다.


6, 당원으로서 그 본분을 잊고 배신 행위를 하고 당의 운동을 방해하거나 또는 하려는 자는 최고의 벌에 처한다.


 


당령


1, 당령은 당원에 대해서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이를 지배한다.


2, 당령은 당 사무 및 당원의 행동에 대해여 책임을 진다.


 


 

글=시인,작가정해룡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2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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