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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봉오리가 둘러쳐진 마을이라 연화1구

영현면 연화리 연화1구마을
최민화기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1년 10월 31일
ⓒ 고성신문

연화봉이 뻗어있고 영천강이 휘도는 마을
재주와 생각이 앞서가던, 행복한 이들의 마을


 


차가운 가을비가 겨울을 재촉하던 날, 옆으로는 영천강이 흐

고, 단풍들이 곱게 물든 길을 따라 마을에 들어섰다. 영현면 연화리 연화1구. 연화산이 마치 연꽃봉오리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다. 마을 한가운데는 너른들 옆으로 조그만 시내가 나른하게 흐르고 있다. 산기슭마다 집들이 붙어있는 폼새가 여느 시골마을의 풍경과 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동네 할매들이 참 젊다는 것. 그리고 마을 가운데 신식건물과 함께 기와장을 올린 옛건물도 함께 있다는 것.


 


# 정체되지 않는 새로운 마을, 연화1구



마을 초입에 들어섰다. 경로당 뒤로 보이는, 허물어진 탑과 초가지붕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올 여름 큰 비 탓일까, 아니면 며칠동안 왱왱거리며 기세를 떨친 가을바람 탓이었을까. 누군가가 정성스레 쌓았을 탑은 붉은 속살을 내보이며 스러져 있다. 스산하기까지 한 풍경. 그나마 바람결에 흔들리며 꽃춤을 추고 있는 코스모스라도 있어 덜 쓸쓸한 광경이다.
자그마한 공원 옆으로 마을 안쪽으로 몇 발짝 옮기자니 생경스럽게도 새건물이 눈에 띈다. 외벽은 황토를 발랐고, 지붕은 초록기와를 이고 있다. 옛날 옛적에 기와공장이 있었다더니, 그 자린가 싶다.



졸졸졸 지즐거리며 흐르는 시내를 따라 마을을 휘돌아다니다 먼발치에서 마을을 빤히 바라보고 섰다. 이 마을은 참 특이한 형상이다. 영천강 연화교를 건너왔는데, 영천강의 지류인지, 끝도 없이 흘러가는 내를 마을 가운데에 두고 한쪽에는 누렇게 고개 숙인 벼들이 펼쳐져 있고, 또 한쪽에는 추운 날씨에 따뜻한 어미의 품을 찾아든 어린 것 마냥 연화산의 봉우리들에 둘러싸인 마을이 있다.
가을 찬비를 온몸으로 맞으면서 가을걷이를 준비하는 분주한 촌로의 모습도 보이고, 새로 지은 집 베란다에 서서 낯선 이를 가만히 지켜보다 눈이 마주치자 도망치듯 웃으며 사라지는 네 살배기 아이도 있다.
풍경으로 치면야 여느 농촌마을과 다를 바 없다지만, 규모는 확연히 다르다. 60, 70여호쯤 될까. 유모차를 들들거리며 다니는 할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차들이 쉬지 않고 왔다 갔다 하고, 유치원에 다녀오는 아이들이 몇몇 노란 버스에서 내리기도 한다. 참 젊어 보이는 마을이다. 정체되지 않은, 활기가 있는 마을이다.


 


# 앞선 생각으로 활기있는 마을



1913년 7월.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씨였다. 연화1구에서는 교풍회가 조직됐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마을을 만들자는 취지였다. 그래서 건전한 생활과 상부상조하는 미풍양속을 지키는 마을로 거듭나는 것이 교풍회의 역할과 신념이었다. 그래서일까. 연화1구는 모범마을의 명성을 아직도 이어가고 있다
50여년 전. 정규효 이장이 아주 어릴 적이었다. 마을에는 기와공장이 들어섰다. 마을 가운데쯤에 서있는 황토집이 그 기와공장의 터다. 여기서 난 기와들은 초가 이엉들을 대신해 마을의 게딱지 같던 지붕들을 고래등 같은 기와집으로 바꿨다. 집집마다 슬레이트 지붕들을 올렸던 새마을운동 시절보다 20년은 족히 앞선 지붕개량이었다.



기왓장을 찍어내던 시절, 마을을 가로지르는 내는 수력발전의 보고였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물줄기에 물레방아를 놓고, 물레방아가 돌면서 만들어낸 전기를 마을로 끌어와 집집이 노르스름한 전구를 밝히고 살았다. 그때만 해도 고성의 산골마을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지금의 아이들로선 상상도 못하던 시절에 연화1구에는 이미 전깃불이 밝혀졌다.
집집마다 들어간 전기 말고도, 도정공장도 이 수력발전기로 돌아갔다. 가을이면, 황금빛 물결로 출렁이는 마을 앞 기름진 논의 벼가 물레방아로 만든 전기를 이용해 백미로 재탄생하곤 했다. 이 마을은 모든 기술과 재주, 사람들의 생각이 앞서가는 마을이었구나, 싶다.


 


# 역사와 바른 사상이 있는 마을



한 200m쯤 될까. 어느 시절에 쌓았을는지 모르는 성터가 다 허물어진 채로 남아있다. 터만 남았다. 지나치는 이들은 성터였는지, 놀이터였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아주아주 옛적에, 정말 연화산에 사는 호랑이가 곰방대를 물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시절에 통일사지라는 절이 연화리에 있었다.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절이란다. 통일사지는 꽤 번성해서 삼층석탑도 있었고 미륵불도 있었더란다.
아무리 번성했던 절이라도 세월을 이길 힘은 없었을까. 절터만 남고 미륵불과 삼층석탑은 세월에 씻기고 치어, 황량한 절터 주변에 흩어져있었다. 미륵불과 삼층석탑은 이제 주민들의 손에 옮겨져, 예전의 번성했던 절은 아니지만, 절터 주변에 고이 모셔져있다.



취산 서호직 선생은 앞서 말했던 수력발전이며 교풍회를 조직해 운영했고, 1917년에는 항일투쟁에 나서기도 하는 등 연화1구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도 마다하지 않던 이였다.
그의 고매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연화1구 주민들은 1973년에 숭덕비를 건립했다. 그리고 매년 음력 3월 15일이면 취산 서호직 선생을 기리는 추념식을 하고 있다. 그는, 명실공히 연화1구의 정신적 지주였다.


 


# 젊은 할매들이 행복한 연화1구



두런거리는 소리에 하하 호탕한 웃음소리가 섞여 들린다. 가을비가 내리면서 날이 갑자기 추워져서 할매들은 경로당에 모여 담요를 덮고 앉아 이바구들을 하신다. 할매들 중에 젤 젊은 할매를 콕 집었더니 60대인 줄 알았던 이 할매가 80세시란다. 이 할매들께서는 아무래도 산삼 달인 물을 드시는갑다.
“우리 동네는 멋쟁이들만 살아가 이리 젊다 아이가. 와 안 젊긋노.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고, 사람들꺼지 다 좋은데.”



아주 예전에는 살기가 이렇게 편하지 않았더랬다. 허리 펼 틈도 없이 이어지는 농사일에 시집올 적 뽀얗던 얼굴은 새까매지고, 섬섬옥수는 굳은살이 박였다. 그래도 그 시절이 있어서 지금은 평안한 노후를 보낸단다.
할매들은 봄 여름 가을까지는 아직도 농사를 짓는다. 날이 조금 추워지면 경로당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재미삼아 민화투도 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도 한다. 누구네 아들이 무슨 일을 시작했다더라, 누구네 집 며느리가 시어메한테 그렇게 잘 한다더라…이야기는 해질녘까지 끊이지 않는다. 낙엽이 내려앉은 조붓한 마을길처럼 할머니들의 웃음이 마을에 내려앉는다.

최민화기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1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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