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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육계의 큰 별이 떨어졌다

박정희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 항일투쟁 주도 송천 김용태 선생 거류면 선영에 안장
글=정출도논설위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1년 09월 26일
ⓒ 고성신문

송천(松泉) 김용태(金容太) 선생님이 지난 9월 20일 오후 5시 40분 경남 진주시 신안동 아파트 자택에서 향년 90세로 별세했습니다. 유해는 22일 오전 경

대학교 장례식장의 영결식과 성당 미사를 거쳐 화장한 다음 고향인 고성군 거류면 신용리 부모님 묘소 옆에 안장되었습니다.
고성의 큰 별, 아니 한국 교육계의 큰 별이 떨어졌습니다. 투병생활이 3~4년 계속 되더니 끝내 우리 곁을 떠나시는군요.


 


#거류면 신용리서 십년 불공 끝에 천재 탄생



선생님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2년 뒤인 1921년 12월 19일(음력) 경남 고성군 거류면 신용리 940번지에서 아버님 김원두(金源斗)님과 어머님 서연수(徐連秀)님의 5남매 중 막내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0년 불공 드린 아들이었습니다. 아버님은 농촌의가난한 선비였습니다. 그러나 일찍부터 개화가 되신 분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선생님에게 다섯 살 때부터 천자문과 소학 등 한문 기초를 가르치셨습니다. 선생님은 다른 어린이들보다도 한문을 깨우치는 능력이 월등해 주위에 천재소년으로 알려졌습니다. 개화가 되신 아버님께서는 열 살(1930년)인 선생님을 고성군 거류면 당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당동공립보통학교는 4년제 학교였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당동보통학교를 4년 만에 졸업(1934년)하고 집에서 1년을 쉰 다음 열여섯 살(1936년)되던 해에 이웃 마암면에 있는 마암공립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하셨습니다. 마암면에는 선생님의 두 분 누나가 시집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누나 집에서 2년간 학교를 다녔습니다. 마암보통학교를 열여덟 살(1938년)에 졸업하시고 바로 관립 대구사범학교 심상과에 입학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당시 머리 좋고 가난한 집 학생들은 사범학교로 모두 몰렸습니다.
선생님은 어릴 적부터 아버님으로부터 한문을 배웠기 때문에 붓글씨도 뛰어났습니다. 선생님은 대구사범 1학년(1938년) 10월에 현재의 국전 전신인 조선미술전람회 서도부에서 입선했으며, 그 이듬해 봄에는 일본 태동(泰東) 서도전람회에서 특선까지 했습니다.


 


#대구사범 대규모 항일투쟁 주도



아버님의 항일정신을 본받은 선생님은 대구사범 2학년(1939년) 9월에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했습니다. 당시는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 대륙까지 침입해 만주사변(1937년)을 일으킨 지 2년이 지난 때라서 조선에 대한 식민지탄압정책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의 언어마저 말살하기 시작했습니다. 피끓는 젊은 조선학도들은 곳곳에서 민족문화고수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의 대구사범 조선어연구회 조직도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조선문화 말살정책에 대항하기 위한 하나의 구국투쟁이었습니다. 선생님의 항일구국투쟁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선생님은 대구사범기숙사에서 악질 일본학생들을 밤중에 한 명씩 불러내 몽둥이찜질을 가하는 방법으로 분위기를 장악하기도 했습니다.
이듬해 즉 대구사범 3학년(1940년) 4월에 선생님은 비밀결사조직인 대구사범 문예부에 가입했으며, 4학년(1941년) 8월 이른바 ‘대구사범 학생의거’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검거돼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3개 조직 약 300명이 검거됐습니다. 그 이듬해 2월에 7년 기소유예 선고를 받고 대전형무소를 출옥한 선생님은 출옥 전에 이미 대구사범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당했습니다. 선생님이 기소유예로 풀려난 것은 어느 선생님으로부터 검거 움직임을 귀띔 받은 후 증거자료를 모두 불사르고, 혹독한 고문에도 입을 열지 않고 버텼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학교 교원이 되겠다는 집념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집에서 독학으로 학업을 연마한 끝에 대구사범에서 퇴학당한 지 만 10개월 만인 1942년 10월 28일 초등학교 교원 3종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그해 9월 10일에는 고향의 모교인 거류초등학교 촉탁교원으로 부임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스물세 살 때(1943년) 음력 12월 10일 성상규(成祥奎) 씨 맏딸인 두례(頭禮) 아가씨와 결혼했습니다.
해방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나이는 스물다섯 살이었습니다. 해방의 기쁨은 선생님으로 하여금 향토 후배들에 대한 불같은 교육열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해방되던 해 9월에 중등학교 과정인 사설 동명학원(東明學院)을 개설해 돈이 없어 중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농촌 후배들에게 중학교 교육을 시켰습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2월에 대구사범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졸업장을 수여했습니다.
선생님은 결혼한 지 5년째(1947년) 즉 스물일곱 되는 해 음력 1월에 장남 낙곤(樂坤) 군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해 11월에 고성공립농업중학교(6년제) 교사로 부임했습니다. 다음해(1948년) 4월에는 조건부중학교 국어과 교사자격증을 받았습니다.


 


#6.25전쟁 때 중병 앓아 생사를 헤매기도



선생님은 1950년(서른 살 때) 3월 이름 모를 병으로 앓아눕게 되었습니다. 병은 점점 중태로 변하여 생사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6.25동란으로 온 나라가 전쟁의 불길에 싸여 있던 때라 먹을 것조차 제대로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남편이 몸져 눕자 선생님의 부인 성두례 여사는 직접 농사일을 머슴처럼 하였습니다. 마른 논 너마지기에 모를 심어 놓고 모를 말리지 않기 위해서 성두례 여사는 날마다 물을 펐습니다. 성 여사는 지게를 지고 다니면서 땔나무도 해 오고 풀도 베어 왔습니다.
하나님은 선생님을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기적적으로 건강이 회복되었습니다. 성 여사를 비롯한 온 가족들의 기도와 정성의 덕분이겠지요.
선생님은 서른한 살 되던 해(1951년) 11월에 통영고등학교 국어교사로 복직하셨고, 3년 뒤인 1954년 봄에는 남해농업고등학교로 부임하셨습니다. 또 서른여섯 살 되던 해인 1956년 3월에 고등학교 국어과 준교사검정고시에 합격했으며 동시에 중학교 국어과 교사자격증도 무시험검정으로 받았습니다.


 


#고성농고에는 1946년, 1957년 두 번 부임


선생님은 같은 해 4월 마산대학(현 경남대학교) 문학부에 입학했습니다. 나이 서른여섯 살에 대학에 입학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듬해 봄에 약 11년 전에 근무한 적이 있는 고성농업고등학교 국어교사로 다시 부임했습니다. 제(정출도 논설위원)가 선생님을 만난 것도 이때입니다. 굉장히 실력이 있는 분이라고 부임하시자마자 소문이 났습니다. 그때 2학년인 저는 3학년 선배와 함께 교내신문을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프린트로 타블로이드판 4개면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매주 1회 발행했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려운 한자 숙어풀이를 연재해 주셨습니다. 한자 숙어풀이는 진학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고 인기를 끌었습니다.
선생님은 1958년 9월 서른여덟 살(만 37세)의 젊은 나이로 고성교육구 교육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 고성중학교와 고성농고 등 고성군 내 각급학교에는 선생님의 제자로서 교편을 잡고 있는 교사들이 많았습니다. 이들 제자들이 선생님으로 하여금 억지로 교육행정책임을 맡도록 적극 권유했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순수 교직자의 좁은 영역에서 벗어나 교육행정가로서 수완과 능력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서른아홉 살(1959년)에 마산대학(현 경남대학교) 문학부 강사로 부임했습니다. 최초로 대학 강단에 발을 디딘 것입니다.


 


#독학과 검정고시로 대학학장에까지 오르다



선생님은 1962년 입학한 지 6년 만에 마산대학 문학부를 졸업했습니다. 마흔두 살의 나이에 졸업장을 받은 것입니다. 선생님이 대학을 다니면서 그 대학의 강사를 했으니 의아하게 여길 분도 없지 않겠지요. 그처럼 선생님은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배움에 몰두하셨습니다.
같은 해(1962년) 2월 ‘순경음(脣輕音)의 발생 및 소실시대 고찰’이라는 선생님의 논문이 문교부에서 심사 통과됨으로써 국가가 인정하는 국어국문학 교수자격을 당당히 획득했습니다.
실로 선생님의 일생은 정규교육이 아닌 자격시험 중심의 일생이었습니다. 생활의 역경을 무릅쓴 독학의 일생이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원시험 합격(1942년), 고등학교 국어과 준교사 검정고시 합격(1956년), 대학교수자격논문 합격(1962년) 등은 실로 뼈를 깎는 노력의 결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선생님은 1962년 4월에는 마산대학(현 경남대학교) 문학부 조교수 겸 마산대학 부설 마산실업초급대학 부교수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마흔세 살(1963년)에 마산대학 문학과장, 마산대학부설 가락문화연구소장 등을 겸임했으며, 국어국문학회 상임회원 겸 경남지회장도 되셨습니다. 특히 선생님의 향토문화에 대한 연구열은 대단했습니다. 선생님의 고성오광대 연구나 향토방언연구 등이 그 한 예가 되겠습니다.
선생님은 1964년에 마산대학 교무과장, 1966년에 마산일보 논설위원을 각각 겸임했습니다. 그리고 1966년 2월 5일에는 마산대학 교수회의에서 학장서리로 선출되었습니다. 당시 마산대학은 재단의 부실로 학장이 잇따라 사표를 내는 등 학교가 존폐위기에 놓였는데, 선생님은 학장재임기간 약 1년 반 동안 교수진의 단합과 학생들의 동요 방지 등 난국수습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1967년 8월에 학장서리직을 물러난 뒤 도서관장에 취임했으며 이듬해 10월에 부교수로 승진하셨습니다.


 


#박 대통령과 친구였지만 교육감 선거서 도움 안 받아



선생님은 마흔여덟 살 되던 해인 1968년 3월경 경남도교육감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신 후 그 이듬해(1969년) 3월 26일 진주교육대학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선생님의 경남도교육감 선거 출마는 대단한 주목을 끌었습니다. 당시 경쟁자는 현직 교육감이었으므로 그의 세력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오직 난마와 같은 교육행정을 바로잡아 보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거대한 기존 세력에 도전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그 도전은 실패했으나 경남 교육계에 던진 충격은 대단했습니다. 썩어 가는 교육행정을 철저하게 개혁해 보겠다는 선생님의 열성이 뜻있는 교육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교육감 선거 도전을 계기로 선생님은 일약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경남 교육계뿐만 아니라 전국 교육계에서 관심을 갖고 선거 결과를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고 박정희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였으며 역시 고인이 되신 통영시의 서정귀 씨 등과 대구사범 선후배 간이었지만, 교육감 선거에 임하면서도 권력을 전적으로 배제한 가운데 철저하게 자력만으로 싸웠습니다. 주변에서 너무 고지식하다고 비판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진주교대 학장 8년에 학교 중흥 신화 이뤄



선생님의 진주교육대 학장 임기 8년 동안(재임했음) 진주교육대학은 획기적으로 중흥되었습니다. 시설 면에서나 교육 내용 면에서나 대단한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학장 임기가 끝날 무렵인 1977년 초에 진주교육대학 교수 전원이 선생님의 2차 연임(3임)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문교부 등 관계부처에 냈을 정도입니다.
진주교대학장 8년 임기를 마친 선생님은 1977년 3월에 부산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1988년 3월에는 울산성신고등학교 교장(8년 간 역임)으로 초빙되어 마지막 정열을 후진 양성에 쏟았습니다.
선생님은 꿋꿋하고 소탈하고 인자한 성품으로 인하여 주변에 친구들과 제자들이 구름같이 모였습니다.
선생님은 사람을 끄는 강력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생각하건데 어려서부터 온갖 고생을 이겨내면서 오로지 한 생각 한 길만 생각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눈빛, 말씀, 표정 그리고 행동이 하나같이 통일되어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이 고성농업고등학교에 재직할 당시 저희들에게 자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김 선생님 명언 “사람은 생각하는 만큼 큰다”



선생님은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큼 큰다”고. 그렇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생각입니다. 그 생각이 한결같으면 행동도 한결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의 생각은 항상 국어사랑-제자사랑-나라사랑-민족사랑이라는 한 가지 길에서 떠나 본 적이 없었다고 저는 감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인품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칭송과 존경이 그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일이 있다면 선생님의 한글사랑입니다. 선생님은 1970년 5월에 한글학회 경남지회장을, 1980년 5월에는 부산지회장을 잇따라 맡으시면서 국어순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셨습니다. 말하자면 국어순화운동이 또 하나의 인생 목표였습니다. 특히 신문과 방송 등 언론기관을 통한 선생님의 국어순화운동은 부산과 경남지역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고성오광대’ 전국적 문화자산으로 키워
선생님은 ‘고성오광대연구보고서’(1965), 문화영화 ‘고성오광대’ 제작(1966), ‘오광대의 사상비교’(1966) 등 고성오광대를 전국적인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게 했습니다. ‘고성군민의 노래’(1962), ‘고성농업중학교 체육의 노래’(1968) 등 각종 노래가사도 많이 지었습니다.
선생님은 국어국문학에 대한 수많은 연구논문 이외에도 100여편의 수필과 수상을 지방언론과 방송국에 발표하시는 등 당신의 문학적 예술적 따스함도 우리 향토에 봄비처럼 뿌리고 떠나셨습니다.
송천 김용태 선생님, 하늘나라에서도 땅 위에서 하셨듯이 우리 향토 우리 겨레를 계속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글=정출도논설위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1년 0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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