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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고성신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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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읍 출신 재거제향우이자 현재 거제경찰서 남부치안센터장인 이임춘 작가의 작품 전시회가 지난 24일부터 11월 5일까지 고성군청에서 열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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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꼿꼿하던 대나무가 아버지의 손끝에서 둥그렇게 오므라지고, 그게 쌓여서 온갖 살림살이가 되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바람이라도 지나가면 대나무가 솨아 뱉는 소리와 댓잎이 찰랑대며 떨어지는 순간은 40년도 넘은 지금까지도 생생한 기억이다. 그 기억은 대나무숲에 서있던 7살 소년을 이름도 낯선 ‘테어링 아트’의 선구자로 키워냈다.
이임춘 작가는 고성초등학교와 고성중학교, 경남항공고 출신의 고성 사람이다.
“어린 시절, 죽공예를 하시던 아버지와 함께 대나무밭에 간 적이 있어요. 맑은 날이었는데도 빗방울이 대나무 사이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바람에 댓잎들이 흩날리는데 7살 나이에도 가슴이 뜨거워지더군요. 저런 걸 그리고 싶다, 생각했어요.”
하지만 소년의 꿈은 꿈인 채로 접어둬야 했다. 현실이 우선이었고, 그래서 취직이 잘 된다던 토목공학과를 택했다.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았다. 중국어를 부전공으로 택해 대만으로 유학가서 동양사상 공부도 했고, 중국어 통역으로 일도 해봤다. 평생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던 즈음, 경찰이 눈에 들어왔다. 남들보다 조금은 늦은 서른살의 나이에 그는 이임춘 순경이 됐다. 지금은 거제경찰서 남부치안센터장으로, 여전히 현직 경찰이다.
“경찰생활을 하면서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같은 게 있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어린 시절을 떠올렸고 붓을 들었는데 마치 고향 고성의 시골길을 걷는 듯한 편안함이 찾아왔어요.”
그게 이임춘 작가로서의 첫발이었을지도 모른다. 공식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건 2003년으로 돼있지만, 그보다 훨씬 전인 90년대 중반부터 그의 미술활동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그냥 그림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지 공예가 즐거웠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버지가 만들어내던 대나무바구니가 떠올랐다. 재현해보고 싶은 마음에 캔버스를 찢고 꼬고 붙였다. 평면이었던 캔버스에 독특한 질감이 일었다. 이거다, 싶었다.
그가 세계 최초로 만들어낸 ‘테어링 아트(tearing art)’는 우리가 흔히 봐온 대나무바구니가 출발이었던 셈이다.
“지금까지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오히려 틀에 박히지 않은, 저만의 창작세계가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어요. 제가 고성 출신이 아니었고, 저의 아버지가 죽공예를 하지 않았다면 또한 이런 작품들은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르지요. 또한 제가 경찰이 아니라면 알 수 없었을 삶과 죽음의 이면까지, 모든 것이 운명이구나, 싶어요.”
이임춘 작가의 작품은 해외에서 더 인정받는다. 2000년대 후반부터 스페인, 터키 이스탄불, 미국 등 해외 초청 전시가 줄을 이었다. 2014년에는 미국 샌디에고 알렉산더 갤러리에서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이 다분히 팝아트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이임춘 작가의 테어링 아트 작품들이 그만큼 인정받고, 테어링 아트 창시자로서 그의 위상이 그만큼 높다는 뜻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성악가 조수미 씨도 그의 작품을 구매했고, 얼마 전에는 프랑스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그의 작품을 사고 싶어 연락해왔다고 한다.
“어느 전시관, 어느 세계적 도시에서 전시하자고 연락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유명인들이 제 작품을 구입하시는 것도 물론 좋죠. 하지만 가장 기쁘고 행복한 순간은 누가 뭐라 해도 일반 관객분들이 제 작품을 보고 멋지다며 좋아할 때입니다.”
이임춘 작가의 캔버스에는 오늘도 쉽지 않은 두 길을 동시에 걷는 그의 삶과 또한 살면서 만나는 숱한 인간군상이 고스란히 담긴다. 이 작가의 작품은 그의 고향이자 테어링 아트의 고향인 고성에서 ‘고성환상곡’이라는 제목으로 다음달 5일까지, 고성군청 민원실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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